“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13:52).

 

하나님이 제 마음에 북한이 열릴 때를 대비하라는 부담감을 주신 이래로 지난 7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제게 ‘서기관’의 마음을 주시고, 한국 역사를 공부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가족이 한국으로 온 것은 제가 한국 나이로 여덟 살 때였습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를 이곳에서 보내면서 제 마음에는 이 땅과 이곳 사람들을 향한 커다란 사랑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실제로 역사를 경험하면서 역사의 파편과 조각들을 배웠습니다.

 

저는 한국전쟁의 참상을 보았습니다. 파괴된 건물들, 우리 집에 있는 총탄 자국, 언덕의 참호들. 또한 차가 다닐 수 있는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뗏목다리 위로 걸어서 한강을 건넜던 것도 기억합니다. 4·19 학생혁명을 겪은 것과 박정희가 일으킨 군사쿠데타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저의 개인 과거, 개인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2003년부터는 보다 이전의 한국 역사를 알고 싶은 열망이 생겨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매우 풍부한 역사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진실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도록 내어드릴 수 있는 많은 보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옛것이든 새것이든 말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며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언급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현재의 모습까지 왔는지 이해할 수 있게 도우며 미래에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알려주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조차도 사용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역사 전체를 걸쳐 볼 수 있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이 나라는 수천 년의 역사에 걸쳐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물론 큰 고통과 어두움의 시절을 견뎠던 것도 사실입니다. 아마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두운 시절을 겪고, 한국 내의 악한 사람들과 한국을 미워하는 적들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일하셨고, 그래서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같은 사람들을 일으키셨다고 믿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인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전략가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또한 리더십과 애국심의 위대함을 보여준 겸손과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일하거나 리더가 되고 싶은 사람은 그의 삶과 일기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세종대왕은 백성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에 대해 깊이 이해했던 통치자였습니다. 세종대왕에게는 사회의 가장 비천한 사람들까지 깨우치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인재를 등용해서 존재하는 문자 중에서 가장 과학적인 소리글자(표음문자)를 만들었습니다. 몇 시간이면 배울 수 있는 훈민정음은 오늘날 정말 연구할 가치가 있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를 축복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결코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사람은 단지 과거의 위대한 인물 세종대왕뿐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에 대해 알 기회가 없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과 더불어, 기독교가 처음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외국 선교사가 아니라 중국에서 기독교를 접한 토종 한국 사람에 의해서였음을 자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것은 매우 독특한 경우입니다. 게다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처음 18세기에 가톨릭이 들어올 때, 100년 후 개신교가 들어올 때-이었습니다. 두 번 모두 기독교의 전래는 새로운 생각을 유입시켰고 기존의 관습에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지난 1백년, 2백년을 우리의 관점에서 다시 돌아볼 때, 실수를 지적하고 결점들을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킬만한 좋은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여기에 세상에 내놓아 조사할만한 오래된 보물이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제가 공부한 사람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윤치호란 인물입니다. 그가 일제 말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분분한 의견 때문에 오늘날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

 

그러나 저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총부리의 위협에 한국의 자주권을 일본에 내주는 문서에 사인을 하기도 했지만, 반면에 즉시 있던 자리에서 사직하고 모든 공직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백성들에게 진정한 독립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진정한 교육과 그리스도의 능력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교회만이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다.”(1889년 3월 30일 윤치호의 일기 중에서)

 

<새 하나님 새 민족>(케네스 M. 웰스, 하와이대학 출판부, 호놀룰루, 1990, pg51/ 김인수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1997)에 따르면 윤치호는 학교를 세우기 위해 공직 생활을 접었습니다. 그에 대한 글들과 그가 쓴 글들을 읽으면서 교육에 대한 그의 생각이 생명의 자연스런 부산물로 또한 예수원 사역의 일환으로 생명의강 학교를 세우는 데 힘을 쏟고 있는 우리의 생각과 정말 많이 비슷하다는 데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모든 진정한 교육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신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예수원 초기부터 우리는 노동의 중요성에 높은 가치를 두었습니다.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 이 말이 예수원의 휴게실에 새겨져 있습니다. 윤치호는 노동의 가치를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의 의무 중 하나이며 그 가치를 아는 것이 한국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송도(개성)에 한영서원이라는 실업학교를 세우고 다양한 실업교육과 농업교육을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교육과 노동을 강조하면서 또한 나라의 연합과 교회의 연합-우리의 변함없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의 중요성에 대해 연설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 당시에 민족주의자들 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경쟁이 커져가고 있었는데 바로 북서부 지역 사람들과 중서부 지역 사람들 사이의 경쟁이었습니다.

 

북서부 지방의 감리교도인 윤치호는 독립운동의 또 다른 위대한 인물, 중서부에서 온 장로교도 도산 안창호와 매우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틈이 점점 깊어져가고 있음을 인식하며 더 깊은 연합을 추구했습니다. 윤치호처럼 안창호도 나라를 위해서 기독교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세우고, 갈라진 틈을 메우는 한 방법으로 윤치호를 교장으로 모셨습니다. 또한 이 두 사람은 애국가의 가사를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윤치호가 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안창호가 썼다고 합니다. 아무도 애국가 가사를 쓴 것이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는 것은 아마 그들의 겸손과 그들의 긴밀한 협력관계 때문일 것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며 두 사람 모두 이 나라의 밝고 강한 미래를 위해 하나님의 방법을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각 사람은 그들 나름대로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지라도 두 사람은 한국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오늘날 더 연구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서 저는 한국의 곳간에서 이 ‘옛것’, 한국의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옛것을 꺼내와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는 사람도 같은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배울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 성경을 주셔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또한 그분은 창조사역의 모든 결과물들을 우리 가운데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역사적으로도 우리가 배울 만한 훌륭한 인물을 많이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구하며 이 세 가지를 배우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이해를 넓히고 미래를 향한 사역을 넓힙시다.

 

발문) 한국 사람들은 진실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도록 내어드릴 수 있는 많은 보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옛것이든 새것이든 말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현재의 모습까지 왔는지 이해할 수 있게 도우며 미래에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알려주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조차도 사용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역사 전체를 걸쳐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저는 성경적 관점으로 보려고 노력하면서 교육과 학교에 대한 여러 글들을 써오고 있는 중인데 오늘은 이와 관련해서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질문을 탐구해보고 싶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아마 정부의 책임이라는 대답을 가장 알맞은 대답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정부가 교육 방법과 인적자원을 규제할 뿐 아니라 많은 돈을 교육에 쏟아 붓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개념이 성경이 가르치는 교육에 얼마나 적합한지 알아봅시다. 또한 현재 공교육 개념의 근원을 살펴보고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추론해 보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먼저, 역사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현재의 공교육 개념은 18~19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다양한 사조에서 성장했습니다. 이 시대는 미국, 유럽, 그리고 동양에 많은 사회적, 정치적 변화들이 있던 때였습니다. 또한 훗날 독일 제국의 성립으로 이어진 프로이센 왕국이 처음 만들어진 때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육과 교육의 사회적 위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국가가 지원하는 의무교육의 개념은 유럽에서 많은 지지를 얻고 있었습니다만 실제로 현실화된 것은 프로이센 왕국 때부터였습니다. 독일의 여러 주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하기 위해 힘썼던 프로이센의 왕은 사람들이 귀족계급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왕은 이를 위한 첫 번째 수단으로 국가가 지원하는 의무적인 공교육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대개 교회나 가정의 손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교육이란 훗날을 위해 어린 세대를 준비시키고 기존의 가치를 전달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또한 많은 경우 교육은 함께 살면서 어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독일의 철학가 요한 고트리이트 피히테(1762-1814)는 왕의 생각을 지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교는 한 인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왕이 원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없는 그런 인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교육 시스템의 목적은 학생을 사회가 원하는 방법대로 생각하고 사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1763년 프로이센의 왕 프레드리히 2세는 모든 프로이센의 어린이라면 5세부터 13세까지는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도록 하는 학교교육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프로이센에서 시작하여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다스리고 있는 오스트리아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녀는 이 교육 시스템을 오스트리아에 대한 그녀의 통치를 공고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 프로이센의 공교육 시스템은 좀 더 세련되고 전문화된 훈련으로 발전했으며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자격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부가 교사, 커리큘럼, 학생들을 통제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부모의 선택이나 종교적 표현의 자유 등이 고려될 여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한편 미국에서는 매사추세츠 주의 주지사 에드워드 에버렛(Edward Everett)이 아일랜드의 감자기근을 피해 계속해서 밀려드는 가난한 아일랜드 사람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습니다. 주지사는 그 사람들을 매사추세츠 주의 훌륭한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강력한 종교적 믿음을 희석화하면서 비가톨릭 사회에 통합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해답으로 프로이센의 교육 모델을 정착시켰습니다. 미국 교육의 아버지라고 여겨지는 호레스 만(Horace Mann)이 이 부분에서 주지사를 강하게 지지했습니다. 그 결과 매사추세츠 주는 1852년 국가지원의 의무 공교육을 채택했습니다. 그 후 공교육 시스템은 다른 주들로 퍼져나가 결국 미국의 보편적인 교육시스템이 되었습니다.

 

  동양의 역사 또한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일본은 19세기 중반 근대화를 향한 발걸음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국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국민들을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프로이센의 시스템을 채택했습니다. 한국은 프로이센의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미국과 일본의 교육시스템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내면화시켜 국가의 이익에 맞게 지속적으로 변형시켰습니다. 이 결과 중의 하나가 현재 한국 교육계에서 불고 있는 폭풍우입니다. 다양한 이해관계의 갈등으로 인해 정치권, 학부모, 종교계 등이 공교육을 두고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도 국가 발전을 목적으로 국가 지원의 교육을 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1장3~5절을 봅시다.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이것은 매우 오래전에 있었던 국가 지원 교육의 예입니다.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이는 다시 말해 국가를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 특별한 교육 프로그램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교육을 받는 한편 성경의 법에 위배되는 음식은 거부했습니다. 그 교육 시스템으로 인해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는 것을 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벨론 왕에게 그들의 정당함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계속해서 교육에 대해 성경이 하는 말을 살펴볼 때, 매우 다양한 관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느 하나도 인간적인 목적을 위해 학생에게 특정한 모습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학생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하신 자유를 즐길 수 있도록 자유롭게 풀어줍니다. 성경적 교육은 하나님의 법과 구원의 도를 가르치면서 사람을 세웁니다. 그것은 아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법을 배우며 자녀들에게는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야훼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야훼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시78:4~8).

 

  누가 이 책임을 수행해야 할까요? 성경은 이 책임이 첫째는 부모요 두 번째는 제자-학생을 말합니다-를 만들라는 명령을 따르는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20).

 

  이 구절들을 묵상할 때 자녀의 교육에 있어서 우리의 책임이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자녀교육을 위해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수록 이 문제가 굉장히 큼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달에는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기독교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발문)성경적 교육은 하나님의 법과 구원의 도를 가르치면서 사람을 세웁니다. 그것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법을 배우며 자녀들에게는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생명의강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의 인생을 준비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목적을 준비하는데 육체적인 일(노동)을 필요한 교육의 하나로 보고 있으며, 그 일에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세상을 탐험하고 이해하길 원하셨기 때문에, 지식을 탐구하는 것에도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세상 역시 ‘알 수 있는’ 곳 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지식을 추구하게 되기까지는 훈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경적 세계관 안에서 우리는 지식, 학문, 노동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전인적 인간입니다. 교육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차원-영적, 혼적, 육체적, 정신적 차원-을 통해 전인적인 인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중 한 가지가 다른 것들보다 귀하다고 여기시지 않습니다. 전인적 인간을 기르는 것은 이 네 가지 영역이 통합될 때입니다. 이 네 가지 영역을 훈련해야 온전한 존재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학생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탁월하게 되길 바랍니다. 또한 삶에 찾아올 도전의 기회를 잘 준비하길 바랍니다. 이는 어떤 학생들은 대학을 진학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한국에서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하는 학생들은 대입 시험을 치러야 하지요.

 

그렇다면, 대학을 가기 원하는 학생들에게 노동은 어떤 준비를 시키는 것일까요?
먼저, 저는 ‘열심히 공부한다’는 표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은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는 누구나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는 암묵적인 추론이 포함되어 있지요. 하지만 제 경험상 막 중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은 대부분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한다는 건, 정보를 암기하거나, 한 페이지를 계속 쳐다보거나, 사건에 대한 단어들을 읽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지요. 아주 솔직한 부모들도 숙제나 설명을 해야 할 때면, 학생들이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또는 어떻게 공부하는 것을 도와주어야 할지 확신이 없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역시 하나의 기술이며, 노동은 직업을 준비하는 하나의 기술입니다.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대답하는 실제적인 훈련인 것이지요. 이는 우리가 학생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노동을 참여할 때에는, 즉각적인 노동의 피드백이 있습니다. 잘 참여하고 있는지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남들에게 확연하게 보이게 됩니다. 잘 참여하지 않고 있다면, 그 학생이 노동과 공동체의 학생들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교실에서의 경우, 잘 듣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조용히 앉아있다면, 잘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또한, 육체적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에는, 몸이 스스로에게 말해줍니다. 몸의 일부는 근육의 이완과 수축으로 통증을 느끼게 되지요. 이는 성장과 발달의 정상적인 부분입니다. 뇌 역시 신체 근육의 일부로, 발달을 위해서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학생이 노동의 방법을 배울 때,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방법을 배우게 되면, 결과를 내기 시작하지요. 학생들은 자신이 일한 것/하지 않은 것을 보면서 직접적인 원인과 결과를 배우게 되고, 책임감을 배우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신감과 책임감을 배우게 되고, 이는 교실과 학문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우리가 노동할 때에 우리의 정신은 멈춰 서는 것일까요? 다행히도, 탁월하게 작업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계속 생각하며,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신체를 하고 있는 일에 적용시킵니다. 그럼 우리가 교실에서 공부하거나 경청할 때 우리의 몸은 멈춰서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잠이 오게 되고, 잠을 깨워야 할 것입니다. 교실은 학문적인 배움이 일어나는 유일한 장소일까요? 물론 아니지요! 노동 시간만이 우리가 육체적으로 열심히 일해야 하는 시간일까요? 물론 아니지요!

 

노동과 공부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관계가 있습니다. 노동에서는 도구가 사용되는데, 교실에서 역시 도구, 또는 ‘방법’을 배웁니다. 도구를 사용 및 적합한 도구의 선택이 사실 일의 성과를 정하게 되지요. 한 과목을 마스터하기 위해 ‘공부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단순한 공식을 암기하는 것보다 효과적이고 탁월한 공부방법입니다.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운 사람과, 드라이버로는 책장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와 같지요.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많은 물건을 고칠 수 있는데,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여러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는 마치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고자 정보를 암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유용한 방법이고, 책장도 얻게 되겠지만, 다른 일을 하도록 적용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렇지만 지식을 적용하는 방법을 배운 학생들은 새로운 지식과 연결하고 새로운 질문을 할 것입니다. 학생들이 대입시험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답을 다 안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아는 것을 적용하여 더 큰 이해와 결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학생들은 자신이 아는 지식을 통해 답을 쓰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공식을 외워 답을 쓰는 학생들보다 시험 준비가 더 잘 된 학생인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 교육은 지식과 창조자가 어떠한 관계인지, 그리고 또 다른 지식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언제나 가르쳐야 합니다. 노동을 하면서 우리가 몸과 마음을 통해 배우는 것들이 교실에서 배우는 것들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노동에 유의미한 측면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사입니다. 교사 없이 도구를 사용하는 모든 방법을 적절하게 알게 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안내책자(메뉴얼)는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만 겨우 도와주는 정도지요. 저는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줄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여러분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었겠지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선생님 없이 그 말만 지키려한다면, 온전한 학습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학생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에게 도구의 사용법을 가르치는 교사가 성경적 관점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홀로 공부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는 지식이 많은 학생을 배출할 수는 있겠지만, 그 정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르쳐줄 교사가 필요할 것입니다. 학생들에게는 자신이 배운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기독교사가 필요합니다. 학생에게는 그 길을 말해줄 뿐 아니라 행함을 보여줄 교사가 필요합니다. 학생에게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계발해줄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생명의강 학교는 소년 소녀들을 온전한 방법-영적, 혼적, 육적, 정신적-으로 교육하는 일을 부모님들과 동역합니다. 학생들이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 앞에서 준비하며 나아갈 때, 그들이 생명의강 학교의 교육을 통해 삶의 도전 과제를 더 잘 준비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책임 중 하나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식(복음)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것,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다음 세대에게 말하는 것이다. 교육은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방법 중 하나다. 기독교 학교는 성경적 세계관을 통해 학생을 전인적인 인간(신체적, 정신적, 영적, 사회적인)으로 교육함으로 이 일을 행하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돈과 시간, 에너지를 희생한다. 한국 사람들 대부분에게 교육이란 마음에 아주 친숙한 주제이며, 또한 교육은 하나님께도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교육에 대해 아주 많은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육에 대해 생각하시는 바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언제나 같지는 않다. 성경적 세계관 교육은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교육과는 다른 목표를 설정하며, 다르게 가르치고, 보기에도 다르다.

 

이사야 55:8, 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로마서 12: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면, 우리는 본받는다는 것에 어떠한 압력이 가해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 문화(한국, 미국, 그리고 다른 문화) 속 교육 체계는 주로 학문적인 목표를 추구하고, 아이를 전인적으로 교육하지는 못한다. 그 문화가 아이를 창조한 분과 디자인한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원칙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헌신적이고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러한 세상의 방식(패턴)에 취약하게 된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생각에 변화를 받아야 한다. 교육의 영역에 중립지대는 없다. 모든 학교와 모든 수업엔 기본이 되는 신념들이 있으며, 각각의 수업은 이 신념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다. 모든 교사는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자신의 수업에 담게 되어 있다.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가 몸에 어떤 음식을 담는지(먹는지) 신경을 쓴다. 우리는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에 어떠한 것들을 담고 있는지 신경을 쓰는가? 아이들이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선생님들은 우리의 신념과 가치를 공유하는가? 우리는 아이들이 그들의 삶 가운데 성공할 수 있을까를 염려하는데, 우리는 성공을 보장해줄 수 있는 그런 준비- 예수 그리스도 안의 정체성과 부르심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것-를 시키고 있는가?

 

나는 지금이 그 어떤 때보다 더 기독교 교육이 시급한 때라고 믿는다. 현대 문화는 기독교 가정의 삶을 잠식하고 압박하고 있다. 취업, 직장, 학교 그리고 교회가 그들을 더 취약하게 만들고, 공급하지 않으며,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한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살기 위해 하나님의 기준에서 도망쳤다. 많은 이들이 삶의 목적이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 젊은이들이 말이다! 우리는 빼앗긴 이 땅을 되찾을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그 땅을.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우리의 적, 사단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았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들이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게 할지 모르나, 그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교육의 영역은 빼앗긴 땅이며, 이것을 되찾아오는 일은 우리의 특권이자 의무다. 이것은 명령이다. 우리는 해야만 한다. 이는 제안이 아니다. 생명의강 학교는 이 명령에 대한 반응이다. 이는 젊은이들을 세상에서 빼내려는 것이 아니며, 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의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준비시키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세상과 맞서게 하는 일이다.

 

마가복음 9: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마가복음 7: 7,8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긍휼, 정의, 자비가 어떤 것인지 보여줄 수 있고, 또한 동시에 전략적이고 목적의식이 있는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키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아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도구를 주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훈련시키는 것은 교육을 통해서이며, 이때의 교육은 ‘마음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변화를 받는다.’는 하나님의 성경적인 원칙을 따르는 교육이다. 아래의 누가복음 말씀은 내가 교장으로 섬기는 생명의강 학교의 학교 성구이다.

 

누가복음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은 “쉐마(Sh’ma)”로 알려져 있는 말씀을 인용하셨다. (“쉐마”는 히브리어로 “쉐마”, “들으라”로 시작되는 문장이다.) 쉐마는 예배로의 부르심이다. 쉐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부모로 하여금 자녀가 하나님께 더 연결되도록 자식을 가르치기를 촉구한다.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에 더 연결되게 하는가?

 

이것이 “쉐마”이다.

 

신명기 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교육은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의 제자 되게 하는 과정이다. 나와 남편은 우리의 가장 큰 책임이 우리의 자녀를 교육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세상 가운데 자신의 자리를 이해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만한 다양한 자료들을 찾아보았으며, 교육이 우리 가정의 우선순위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직업과 여가를 조정했다. 교육은 우리가 저녁밥을 함께 먹을 때 이루어졌다. 우리가 데려온 손님들, 친구들과 함께 이루어지기도 했고, 같이 살았던 사람들도 함께했다. 교육은 축구장, 농구코트, 도서관, 그리고 차 안의 대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아이들은 우리가 삶으로 증거 하는 것들을 보았고, 우리가 때로는 증거 하지 못하는 것도 보았고, 또 우리가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았다. 우리가 무엇을 사는지 보았을 때 교육이 일어났으며, 우리가 무엇을 사지 않는지를 보았을 때도 교육이 이루어졌다. 우리가 보는 것, 우리가 읽는 책과 우리의 평가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아이들이 듣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조차 교육은 이루어졌다. 신명기가 가르치는 것은,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장소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이해하고, 우리가 언제나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자녀를 사랑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 사려 깊고 현명한 부모가 되는 것이다. 사실 학교는 교육에 있어서 우리를 돕는 존재일 뿐이다.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의 질문에 답하고,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가르칠 수 있는 기회라면 모두 잡는 것.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유의미한 방법으로 “함께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자녀들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자녀들을 돌려받기를” 갈망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야고보서 4: 2-3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교회는 부모들이 자녀를 가르치는 것을 도울 책임이 있다. 하나님은 교육의 목표를 긍정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마태복음 29: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교육 목표라고 할 수 있을까?

 

제자를 만드는 일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학생을 두는 것과, 모든 명령에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복음전도의 대명령이며, 교육의 대명령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회는 개인을 복음화 하는 일을 더 우선시 하였으며, 학생을 가르치고 제자를 만드는 일을 소홀히 하였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많은 교회에 선교단체 및 선교사들이 소속되어 있지만, 학교는 얼마나 될까?

 

제자를 기르는 교육은 아주 중요하고,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다. 주일 하루에 주일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통합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이다. 하나님에게 중요한 일이라면, 우리는 필요한 시간을 들여, 목적의식을 가지고 학생들을 학교에 보내는 일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기독교 학교를 통해 하고 있다. 교사들과 그들의 방식, 관리자와 스텝들, 학교 경영까지 모든 것들이 세계관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전진하는 시각을 드러내준다. 우리 학생들은 세상의 싸움에서 피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킬 도구를 받았다. 학문적인 탁월함은 개인의 직업 능력 신장을 위한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다.

 

교육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가정에 있다. 쉐마를 기억하는가? 하나님은 아이들을 가정 안에 두셨다. 아이들을 교육할 책임은 일차적으로 가정에게 있으며, 아버지에게, 가정 내에서는 가정의 머리로서 아버지가 주된 책임을 진다.

 

시편 78:5,6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부모는 자녀를 다른 누구보다 사랑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디자인이며, 세상이 이를 바꾸거나 왜곡하려하는 만큼, 여전히 그 관계가 자녀를 양육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부모는 그 교육에 대한 책임을 보물같이 여겨야 한다. 이 책임이 박탈당한다면, 아이들이 고통 받게 될 것이다.

 

“구명보트 이야기”라고 부르는 예화를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예화는 우리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아주 강력한 예화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 예화를 들었는데,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토론 형태로 사용될 때 가장 효과적이지만, 여기서는 이야기체로 쓰겠습니다.

 

바다에 심한 태풍이 몰아치고 배가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구명보트에는 여섯 명의 생존자만이 가까스로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생존자는 나이가 많은 여자 대학교수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생존자는 이혼한 젊은 여성과 11살짜리 그의 아들입니다. 네 번째 생존자는 파산해서 지금은 절망상태로 마약과 알코올에 중독 된 중년 남성입니다. 다섯 번째 생존자는 부유한 은행가로 자애롭고 신실한 기독교인 남성입니다. 마지막 생존자는 잘 알려진 도시에서 온 정부 관리로 남성입니다.

 

구명보트에는 구조되기 전까지 바다 위에서 버티기 위해서 다섯 명(어린이를 포함)의 사람이 일주일 동안 마실 수 있는 물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다섯 명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누구를 희생시켜서 바다로 던져야 할까요?” 입니다. 여러분은 왜 그 사람을 선택했나요? 어떻게 해서 그런 결정을 내리셨나요? 결론을 보지 말고 계속해서 읽어나가십시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멈춰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결정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결정에 도달했는지에 대해서.

 

누가 배에서 내려야 할까요?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글쎄 누군가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원해서 뛰어 내리지 않았을까?” 그것도 귀한 생각입니다만, 여러분에게는 여전히 누가 그러한 판단을 할 지 선택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니, 아무도 자원하는 사람은 없다고 칩시다.

 

이 이야기는 생명의 가치에 대해 많은 토론 거리를 제공합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살리고 싶습니까? 왜 그 사람들을 살리고자 합니까?

 

하나님의 답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관점은 무엇일까요? 사실 문제 자체가 잘못됐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모든 생명이 동일하게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배에서 내리지 않습니다. 생존자들은 이 문제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은 생존자들을 문제 밖에 둡니다. 아마도 모두 목이 말라 죽을 것입니다. 엄청난 손실로 보이십니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결과를 판단할 책임이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일입니다. 결론은 아무도 배에서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이든 죽음이든, 하나님을 신뢰하며.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

부모님께.
부모님들의 자녀교육을 도울 수 있는 특권을 저희에게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여러분들의 신뢰를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동시에, 저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구할 때, 이 신뢰가 저희에게 짐이 되지 않음을 압니다. 생명의강 학교는 우리 모두의 학교이고, 교육의 책임은 가정에 있습니다. 신명기 6장 4절~9절에서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5절에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6장 처음부분을 보면, 이 말씀의 대상은 각 가정의 ‘아버지’이고, ‘가족’입니다. 저희가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삶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 합니다. ‘가족’은 가치와 사랑을 가르치는 더 큰 선생님입니다. 아이들은 여러분이 무언가를 하는 것, 또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에서 배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들과 딸을 위해 대안학교를 선택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대안적인 부모가 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안적인 부모란 어떤 모습을 한 분들일까요. 아마, 여러분과 같은 모습일 겁니다. 대안적이라는 말은 무언가 조금 다른 결정을 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의 법칙 중 하나는 두 개의 사물이 하나의 공간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있기로 선택했다면, 동시에 다른 곳에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돈을 하나의 목적 아래 사용하기로 결정했다면, 같은 돈을 다른 곳에 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하고 진리를 추구하기로 결정했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여러분이 원하는 다른 것을 믿거나 다른 진리를 추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사랑에 항복하기로 하셨다면, 두려움이 설 공간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배우자를 사랑하기로 선택하셨다면, 다른 사랑이 들어올 공간이 없습니다. 이 시간에 이것을 하기로 했다면, 다른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일식집에 가면, 중국요리는 먹으러 갈 수 없습니다.

 

부모님들이 공급해 주시는 것들이 바로 우리 학교가 가진 자원이라는 사실을 대안적인 부모인 여러분들은 아셔야 합니다. 창의적인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학교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자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학교의 작은시설이 어려움이 된다면 대안적인 부모로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해결책을 고민하고 풀어나가야 합니다. 대안적인 부모로서, 우리는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혜를 주시라고 아이들과 함께, 또 다른 부모님들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대안적인 부모로서, 우리는 기독교 교육에 대해서 더 배워서 이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더 잘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대안적인 부모로서, 학교 통학에 어려움이 있음을 발견했다면, 우리 학교가 부모님들이 원하는 유연성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안적인 부모로서, 아이들이 대안 교육을 받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희생을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그 희생은 우리에게 기쁨이 됩니다.

 

생명의강 학교는 기독학교입니다. 이는, 생명의강 학교가 대안학교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국의 많은 교육기관들이 서있는 지점과는 다른 곳에 우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이러한 교육이 항상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 년 전부터 많은 학교들이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각자의 직업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을 양성해내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두 개의 공간을 동시에 차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지 않는다면 세상이 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죄가 우리가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에 대하여 완전한 희생양이 되셨고, 이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대안적인 학생들을 양성해낼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으로 사랑의 방법을 택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의 마음을 나 자신의 문제로 염려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내 형제들을 위하여 염려하는 데 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자로 살아가지 않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2011년 3월 5일 패밀리데이 강의
교장 리즈 토레이

 

저는 지금 일 년 전 여기에 서있을 때와는 다른 열정과 헌신으로 서있습니다.
작년보다 훨씬 더 큰 열정을 가지고 저는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희는 개교 이래 학교 행정실에서 많은 가정들과 전화통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가깝게는 태백에서, 멀게는 서울, 부산 등 여러 곳에서 저희 학교를 방문해주셨습니다. 또한 많은 단체들 또 소모임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많은 가정들이 아이를 가정으로 돌아오게 만들 수 있는 교육, 또한 그 가정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교육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교육은 회복하는 힘이 있다고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는 교육은 아이를 회복시킬 뿐 아니라, 가정을 회복시킬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나라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러한 교육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제가 그것을 보았다고 말씀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성경에 기초한 교육은 효과적이며, 아이들을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많은 가정들이 이러한 교육을 원하고 있습니다. 많은 부모님들은 아이들 스스로가 공부하는 의미와 목적을 알길 원하며, 아이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작년에 이루어졌던 모금은 생명의강 학교를 시작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작년에 참석했던 분이 이 자리에 계시다면, 꼭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몇 가지 보고를 드리고 싶은데요, 여러분께서 주신 돈으로 저희가 학생들과 더 나아가 학교 공동체의 삶을 얼마나 풍성하게 만들었는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들께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러분이 주신 돈을 낭비하지 않는 것, 또한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현재의 한국 상황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경에 기초한 교육은 대안학교에서만 할 수 있으며, 대안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돈이 많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인 공동체는 기독교 교육을 이루어내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기독교 교육은 부자들만 받을 수 있는 교육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세대를 기르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저희 교직원들은 올해 아주 적은 수당만을 받고 학교를 섬기는 헌신을 감당해 주었습니다. 또 저희 학부모님들은 약속했던 등록금을 성실하게 납부해주셨으며, 더 지불할 수 있을 때마다 더 도움을 주셨습니다. 또한 학교 건립을 위한 바자회가 황지교회에서 있었는데요, 그 바자회에서 저희 학부모님들은 아주 중요한 부분들을 섬겨주셨고, 바자회에서 1900만원이라는 결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많은 분들이 저희에게 지속적으로 후원해주시고 계십니다. 또 저희는 1학기에 9인승 스타렉스로 통학버스를 운영하고 있었는데요, 저희 학교 학생이 10명으로 늘게 되었을 때 25인승 버스를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3월에 8명의 학생으로 시작했구요, 지금은 12명의 학생과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생명의강 학교에서 저희가 만드는 학습 공동체는 서로의 독특함을 귀한 가치로 받아들이며, 서로에 대해서 배워가는 공동체입니다. 만일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러한 이해로 인해 우리는 더 지혜로워질 것입니다. 저희 학생들은 북한과의 긴장 가운데 있는 한국의 상황가운데, 우리의 지도자들이 이런 지혜를 얻기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생명의강 학교에서는 노동을 합니다. 저희는 올해 삼수령 목장의 우사에서 일을 해왔고, 옥수수를 심고, 김을 매고, 또 수확하는 일을 했습니다. 선생님들은 모두 학생들과 함께 노동을 했습니다. 교육자로서 참된 모델은 학생의 위에 서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함께 가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는 일은 참 어렵지요. 처음 노동을 시작했을 때는 모두가 신기해하고 즐거워했지만, 이제는 그냥 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것이 현실이거든요. 저희는 노동의 가치를 배워가고 있습니다.

 

노동 뿐만 아니라, 저희는 국어, 영어, 수학, 역사, 과학, 성경, 음악, 미술, 한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등산도 가고,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축구도 하고, 눈이 많이 오면 눈 삽질도 하지요. 또 저희는 삶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북한에 대해, 그리고 인간관계나 품성에 대해서도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 주 저희는 “백설공주”영어 뮤지컬을 근처 초등학교에서 상연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탈북자 및 다문화에서 온 아이들을 초청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구요. 근처에 있는 동굴이나 해변에 현장학습을 다녀오기도 했고, 카이스트에 방문하여 핵 에너지에 대한 강의를 듣기도 했습니다.

 

저희 학교가 올해 개교한 학교이기 때문에, 저는 교육과정과 수업시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수업시간보다 더 제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쉬는 시간 복도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일입니다. 이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이 저희의 잠재적 교육과정, 즉 저희 학교의 성격과 문화를 더 반영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저희 학교를 방문하시게 될 그 때, 복도에서 뛰노는 아이들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실 수 있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6장 4절~7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교육은 세상을 회복시키며,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과 우리가 지원하려는 모든 프로그램들은 주님이 하신 말씀, 네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신 그 기본 명령에서 시작됩니다.

 

2010년 11월 30일 MCM HAUS에서
리즈 토레이. 생명의강 학교장

 

다른 사람에게 인상을 주기 위해 디자인한 물건은 무엇일까요? 영향력을 주는 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기꺼이 많은 돈을 지불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유용하게 사용되는지 능력은 의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것을 소유하기 위해 빚을 지기도 합니다. 핸드백! 아니오! 교육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한국에 학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요. 너무나 많은 학교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옛날 항해사의 노래”의 시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물, 물, 사방에 물이 있지만, 정작 마실 물 한 방울이 없구나.”

 

한국의 교육적인 상황은 학교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듯 합니다. 다만 우리의 청소년들만 목이 마를 뿐입니다.

 

교육의 기본적인 목적은 다음의 질문에 답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세계는 무엇에 대한 것인가? 이 세계는 왜 여기에 존재하는가? 이 속에서 나의 목적은 무엇인가? 교과과정의 학문적인 엄격함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해야 하고, 학생과 교사들을 도와 이들이 삶과 발견, 목적의 복잡한 문제들을 파악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과 사랑의 관계에 기초한 교육, 오직 하나님의 계시적인 능력만이 교실에서 진리를 드러내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삼고, 우리 교육에서 하나님을 떠나 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가르치는 학교, 진정 “기독교답게” 가르치는 학교가 다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교육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우리 자녀들을 교육해야 할 절박함을 안고 있습니다. 현대 문화는 우리 청소년들을 삶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에서 떠나도록 압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땅을 개간하기 원합니다. “온 땅은 여호와의 것이요 또 그 안에 거하는 것도….” 원수는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원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교육의 영역 또한 잃어버린 땅이지만, 우리는 되찾아야 할 특권과 책임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긴박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도록 양육하라고 말씀하실 때 다른 제안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고 위임입니다. 생명의강 학교는 이 위엄에 대한 응답입니다.

 

오늘밤 제가 여기에 통역하는 분을 두고 서서 말할 때, 제 스스로 한국인 학교의 교장으로 미국인인 제가 선택된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게 된 여정은 다른 분들께도 그렇겠지만, 제게는 실로 놀라운 것입니다.

 

교장으로의 부르심을 확인했지만, 부르심이 항상 합당한 자격을 동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일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을 붙여주셨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도움의 손길들도 얻게 될 것입니다. 저를 돕는 분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에게도 생명의강 학교를 시작하기 위해서 저희를 도와주시길 요청합니다.

 

개교는 2010년 3월로 계획하고 있는데, 지난 9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두 명의 학생과 그 학생의 가정이 2학기에 그들이 다니던 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내년 3월 생명의강 학교 개교까지 기다렸다가 입학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 중에 한 학생은 오늘밤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명의강 학교가 이 두 가정의 신뢰와 믿음, 기대로 이미 시작됐음을 깨달았습니다. 격식을 갖춘 학교 건물과 기술, 도움이 없다 해도, 어떤 것도 교장으로서 제가 이 두 가정이 개교까지 기다리는 시간 동안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을 돕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느슨하긴 하지만 일정의 교육과정으로 이 두 학생을 돌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교사는 이미 이 학생들을 가르침으로 학생들과 함께 학교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생명의강 학교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선지자 스가랴의 말씀을 상기합니다. “작은 시작들을 경시하지 말라”

 

매우 작고 미약한 시작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장래에 이루어질 장기적인 결실을 기대합니다. 생명의강 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2009년 10월 29일(목) 저녁 7시 MCM HAUS에서

리즈 토레이. 생명의강 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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