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이 만나는 시간(17.4.12~13)

 

북에서 온 특별한 친구들이 생명의 강 학교로 방문했습니다. 

유월절을 함께 준비하고, 함께 보내면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송영일 팀장님과 함께 하는 디자인 씽킹!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디자인 씽킹과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마지막 그림은 송팀장이 그려주신 학교 그림입니다. 




하하

Rol's News


2017년 생명의 강 학교 개학!


생명의 강 학교가  드디어 시작했습니다!

올해에는 새롭게 도전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한 해입니다. 

계속적으로 기도해 주십시요!


이번에는 특별히 중 1 현호준 학생과 고 1 권다인 학생이 학교 입학을 결정하였고,

곽사라 선생님이 미술 파트 타임을, 주방은 선형이 어머니께서 섬겨 주시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1명의 학생과 9명의 교직원이 함께 만들어 갈 학교를 기대합니다!




16년 10월 6일 2시부터 3시까지 예수원 69기 지원자가 학교에 방문하셨습니다.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께서 기독교 세계관과 교육, 학교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2015년 5월 24일(일)~25일(월)까지 삼수점에서 24시간 예배가 있었습니다.

이 예배에 생명의강 학생들이 참여했습니다.

그 후기입니다.

 

삼수점 예배후기

생명의 강 학교 삼수점 기도.pdf

 

우리는 서핑보드 위에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은 설령 서핑보드가 뒤집어질지언정, 우리는 손에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면 되니까. 지금 우리가 할 것은 한 마음을 품고, 이 진귀한 기회를, 짜릿한 서핑을 즐기는 것이다. -by Principal Liz

 

설리설리 두준두준......
불타는 열정으로 두근대는 가슴에 잠 못 이루던 때가 바로 어젯밤 같은데, 이젠 그 풋내기 시절의 설렘은 사그라지고 어느새 일 년 후 졸업을 앞둔 생강 ‘장아찌’가 되어 있다.

학교와의 인연은 나의 ‘초딩’시절 때부터 지속되어왔다. 부모님의 권유(?)로 준비된 백성 기도회에 참여하다 네 번째 강 프로젝트에 대해서, 당연히 학교에 대해서도 듣게 된 나. 자세히 알아들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안학교를 세울 거라는 말을 들었던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뭔가 Feel!이 왔다. ‘아, 내가 가야겠다!’

 

그후, 네 번째 강 계획에 관심을 가지게 된 나는 자발적으로 준비된 백성 모임에 참여해 예배하고,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기도하였다. 당시에는 무려 99% 정도가 어른들이었고, 학생이 별로(아예?) 없었던 데다 하나님도 잘 모르고 뭣도 모르는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매우 뻘쭘하고 괜히 좌불안석이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 그 시간들이 나를 준비시키는 귀한 과정이었음에, 그 부족하지만 순수했던 기도들을 들으셨음에 감사하다.

 

   
▲ 생명의강학교 입구에 세워진 표지판 ⓒ생명의강학교

 

중 1때 노동학교 참석은 생명의강 학교에 가야겠다는 나의 다짐을 다시 한 번 확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건 꼭 자기소개 할 때 대안학교 다닌다고 하면 왠지 멋있어 보일 것 같다거나, 친구들이 다 똑같은 학교 다닐 때 혼자서 다른 학교에 다니면 뭔가 특별해 보일 것 같은 거창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세상에 대한 반감과 자괴감으로 가득찼던 가련한 열네 살 소녀의 가슴에 적셔주셨던 북한선교에 대한 막연한 비전과 희미한 사명감이 이 학교가 ‘내가 꼭 가야 할 곳’이라는 마음을 먹게 하였다.

 

그런데 학교는 내 생각처럼 빨리 지어지지 않았다. 뿅 하고 생기면, 짠 하고 바로 가면 될 줄 알았는데....

 

2010년, 그러니깐 안식년으로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다양한 경험들을 쌓고 있을 즈음 태백에 새로운 학교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조금 과장을 보태, 학교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코딱지보다 조금 큰 건물에 우리 집 마당만한 운동장. 밤이면 긴 생머리에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나올 것 같았던. 저런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참 불쌍하다 생각했던. 예전에 친척집 가거나 할 때면 몇 번씩 지나치곤 했었던 초라했던 곳.

 

그런데? 새로 생긴 학교가 바로 그 ‘하사미 분교’라는 곳을 임시건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설마하니 그 학교가 바로 ‘그’ 학교였다.

 

게다가 자세히 알아보니 갓 태어난 그 신생학교는 중2까지밖에 학생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그 시절에는 선배님이 선생보다 높고, 한두 살 차이에도 마치 몇 십 년 세월이라도 차이 나는 듯이 깍듯한 존댓말을 썼었는데, 내가 그 학교에 들어가려면 일 년을 꿇어야 한다는 말.

 

버스에서 고등교복을 입은 친구들을 만나면 좀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 걱정이 되었지만, 동생들이랑 친구 먹는 건데 적응 잘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많은 고민 끝에 마음을 다잡고 원서작성을 하고 면접을 봤다.

 

보자마자 덜컥 합격. 고민도 고민이었지만 한편으론, 당시 다니던 일반학교를 자퇴하고 일 년 동안 잉여처럼 혼자 지내 학교가 많이 그립던 터라 몇 달 동안 기대수치가 무럭무럭 상승해 있었다.

 

특히, 등교 전날에는 너무 설레서 한 숨도 자지 못했던 것 같다. 내일 학교에 가면 양쪽으로 머리를 땋은 산골 아이들이 양 볼에 보조개를 드러내며 “아, 안녕? ^-^ 너무너무 반가워~ 정말 환영해 우리 친하게 지내자! 호호호”하며, 홍조 띤 얼굴로 다가와 내 손을 꼬옥 부여잡아 줄 것만 같았다나?

 

그 런 데 등교 첫 날,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눈앞에 펼쳐졌던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壯觀)’이 아니던가. 상상 속 영희와 철수는 다 어디가고, 중2 병에 걸려 보이는 아이, 맨 인 블랙도 아니고 올 블랙 패션에다가 검은 아우라가 비치는 아이. 부담스러운 눈빛들. 견제하는 듯한 느낌. 면접 때 학생들 자랑을 늘어놓으시던 외쿡인 교장선생님이 심히 원망스러워졌던 순간이었다.

 

오리엔테이션 시간의 그 어색했던 분위기는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뭐하는 학교인지도 모르는 것 같고, 학교에 억지로 온 아이, 심히 융통성 있는 커리큘럼, 가히 기독교 학교라고 여겨질 만한 행동들과 언어들은 그동안 꿈꿔왔었던 나의 학교생활, 그 환상을 증발시켜버리기에 충분했다.

 

   
▲ 생명의강학교

 

2011년, 나의 ‘생명의 강 항해일지’는 그렇게 열일곱 살 때 시작된다. 하지만, 난 그 대단한 학교에 얼마 되지 않아서 적응했고, 여자 애들과의 관계는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엄청난 진전을 보여 이전 친구들만큼이나 친해지는 결과를 달성했다.

 

우리는 자주 카페에 모여 하나님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가는 줄 몰랐고, 매일 문자메시지로 그분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들을 나누며 신앙의 깊이를 쌓았다. 우리, The Rols 1st들은 정말 많은 경험을 함께 겪었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같이했기에 얼굴만 보고 있어도 힐링이 되는 엿처럼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

 

지금 난 시트콤 같은 나의 학교생활을 즐기며 열심히 다니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모든 이들에게 학교가 이렇게 ‘재미있는 곳’이길 소망한다. 아직 어색하고 부족한 점들이 정말 많지만 시행착오를 겪으며 진전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이 학교의 역사 한가운데에 서 있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아마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는 학교 모습과 실제는 많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쭉 이렇게 싱숭생숭한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았으면 한다.

 

생명의강 학교에서 배운 것은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수용’, 그리고 비록 맨땅일지라도 과감하게 시도해보는 ‘용기’, 서로를 견뎌주는 ‘인내’, 혼란 속에서 그 분의 음성을 듣는 ‘믿음’, 감정을 표현하는 법, 소통하는 법, 사랑, 노동과 기도.

 

통일을 준비하는 학교인데 왜 북한에 대한 걸 배우지 않는지 답답했던 나에게, 그 땅의 문이 열렸을 때, 이 학교에서 받고 있는 이 훈련들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쓰일지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 길을 내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 모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저번 학기에는 국적불명의 ‘권태감’이라는 쓰나미가 우리를 덮쳐 한동안 허우적거렸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이 해답 없는, 하지만 뜻있는 길을 함께 개척해 나가고 있다.

 

버티기 힘들고 어려웠던 과정을 여기까지 견뎌낸 것은 서로를 향한 응원과 중보, 발로 뛰시는 부모님들과 인내심의 초 절정을 달리는 선생님들, 그리고 샘플로 실험되기를 자처한 우리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싶다.

 

많이들 묻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 안 돼?” 아침 예배시간에 나누었듯, 얼마 동안엔 나다나엘이 빙의해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으리오...하는 회의감에 푸욱 빠져 있었고. 허허
일 년의 학교생활을 앞두고 있는 요즘도 걱정이라는, 두려움이라는 놈이 가끔 내 마음 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곤 한다.

 

높은 벽 앞에서 좌절한다. 넘어진다. 진도도 많이 뒤처지고 있고, 뇌 속의 ‘delete system’은 통신망 속도와 더불어 날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고, 초스피드로 달려가는 세상과 초 여유롭게 가고 있는 학교 사이에서 이질감을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나의 마음속에 ‘확신’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또 일어선다.

혹자는 말한다. “넌 너무 현실을 몰라.” 현실, 하하... 대강 어떤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안다. 하지만, 걱정 안 해주셔도 된다. 나는,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난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에 덜컥 붙거나(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정말 감사하겠지만) 사회에서 쉽게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도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실패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지 말자는 뜻으로 오해하시지 않길 바란다. 우리는 각자에게 맡겨진 공부를 꼭 해야 한다. 열심히 하나님이 쓰실 때 기분 좋은, 최고의 도구로 준비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런 막연한 생각이 우리를 계속되는 귀차니즘 모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후회 안할 만큼만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처음이니만큼. 우리 모두 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함께’ 잡아주며 갔으면 좋겠다.

 

‘처음이니까 너희가 대학을 잘 가야 후배들에게도 본이 되고, 학교 위신도 높아지니까 열심히 잘 해봐라. 공부를 해야지 학생인데... 잘 될 수 있을까? 대학 잘 가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라... “여러분들에게 자주 듣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죄송한 말씀이지만 들을 때마다 부담이 되고 마음이 불편하다. 진리를 찾아 헤매는 우리의 건전한 방황에 쏟아지는 과분한 관심들. ‘될 대로 되라’식의 빨리빨리 트렌드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 식의 주입식 트렌드. 창조론에 대해 단연코 의심조차 해보지 않고, 그게 당연하다 믿어온 나로서는 아주 이해가 잘 된다.

종교도 강요되어지고, 교회 안에서도 알게 모르게 ‘사상’주입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으니깐.


우리는 이러한 흐름에 작은 파동을 일으키는 역을 맡았다. 대추나무라고 알고 있던 것이 실은 다래나무가 아닐까...처럼 조금은 무모해보일 수 있는 돌맹이들을 던지고 있다. 지금은 보잘 것 없어 보일지 모르나 후에 아주 큰 변화를 일으킬 스타트를 끊은 것이다. ?-!로의 변화는 사실상 진행 중인 것이다.

 

다시 돌아가, 현실은 내가 최상의 교육을 받고 있고, 하나님이 그의 자녀를 최상의 길로 인도하실 거라는 사실. 문제를 덮지 않고 해결하고 넘어가려고 하고,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하는 매일 더불어 변화하는 그것이 최상의 교육. 나를 너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끄실 것이 확실하기에 최상의 길.

 

아, 행복하다. 찾으며 두드리며 가는 이 과정이. 짜릿하다. 그 분의 음성을 내비게이션 삼아 한 발자국씩 조심스레 내딛어보는 이 삶. 여기저기서 후원 들어오는 기도를 촉매제 삼아 우리는 자라고 있다. 이것이 청춘이요, 열정이 아닌가. 이 뜨거운 삶을 이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축복을 나는, 우리는 포기할 수가 없다.

 

   
▲ 태백 생명의강학교 엄지은 양 ⓒ생명의강학교

작년까지만 해도 특정 학생들만 옮기던 의자와 책상을 이제는 다함께 옮긴다. 눈에 보이는 성장, 느껴지는 우리의 배움. 서로의 모습 속에서 발견되는 예수님. 어느 누구도 더해지거나 빠져서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정교하게 연결된 우리 공동체에서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 내가 소중한 사람이구나.’ 저절로 깨닫게 되는 시간들. 맏언니 미소를 짓게 만들어주는 상쾌한...후배님들?! 이런저런 에너지들로 인해 오늘도 지독한 회의감과 뿌연 무료함을 딛고 일어서 한 발짝 걷는다.

p.s. 이렇게 자라기까지 수많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학교에서의 시간들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 훈련이었는지 십대의 끝자락에서 새삼 느낀다. 그간 모난 나를 견뎌준 선생. 부모. 친구님들께 심심(甚深)한 감사를 드린다.

엄지은/ 생명의강학교 고등학교 3년

*이 글은 생명의강학교에서 발행하는 잡지 최근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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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기사 링크 http://www.ukore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25

 

자녀를 가르치는 데 있어 부모의 역할에 대해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신명기 말씀부터 시작해 봅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 6:4-9)

 

 이 구절은 우리의 모든 사랑은 주 우리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한다는 훈계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으로, 우리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생각나게 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애굽기 20:3)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순종, 그리고 사랑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 중 가장 첫 번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계명을 다른 의무들과 상충되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이 말씀 때문에, 목사나 사역자는 교회나 예배를 항상 가족에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성경 곳곳에는 우리가 배우자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하고 섬기라고 맡기신 사람들을 사랑할 때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 말씀의 구체적인 적용 방법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부모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자녀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사랑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부지런히” 이 계명을 가르쳐야 합니다. 집에 앉아 있으면서, 자녀들과 길을 걸어가면서, 쉬려고 누워 있을 때나 아침에 일어나면서도, 자녀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명령에는 우리 가정생활, 특별히 아버지된 우리를 위한 몇 가지 구체적인 암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가 아들과 마음을 나누고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함께 앉아 있을 때 아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서 자녀들을 양육하며 지켰던 확실한 규칙 하나는 가족 전부가 항상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은 대화와 나눔의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한국 문화에서는 식사시간에 별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저녁식사 후에 차를 마시면서 자녀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좀 이상할지 몰라도 위의 말씀을 연습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누워 있을 때, 일어날 때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이나 아침-아마 아침식사 때-에 가정 경견 시간의 형태로 시간을 갖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직장이나 교회에서 맡은 일로 매우 바쁘고 때문에 이처럼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관점에서 우선순위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야 합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녀에게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데 있어 가장 우선적인 책임은 아버지에게 있으며, 자녀와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냄으로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앞에 이야기한 것은 단지 몇 개의 예일 뿐이며 각자 자신의 가정에 가장 알맞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이 말씀”을 우리 손과 이마에 두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다시 말하자면 계속 눈에 띄는 장소에 말씀을 두라는 것입니다. 또한 손에 말씀을 두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 일하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녀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일을 할 때, 자녀에게 똑같이 하라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마에 말씀을 두는 것은 우리에게 항상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자녀들과 함께 하는 대화에서 바로 이런 것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마 직장에서든 길에서든 아버지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경건하지 않은 세상에서 경건을 위해 노력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볼 것입니다. 이 때, 저녁시간에 자녀들과 함께 나눌 구체적인 교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실제적인 어려움과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했는지 혹은 올바른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어떻게 고심하고 있는지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자녀들과 함께 고민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강력한 가르침입니까!

 

 이제 성경은 문설주와 대문에 말씀을 두라고 말합니다. 문설주는 집 안, 가족이 함께 사는 공간을 나타냅니다. 가족 안으로 들어갈수록 이 명령을 기억해야 합니다. 문은 집 안에서 세계 밖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언가 사회적인 결정과 판결을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바로 성문이었습니다. 가정에서 사회로 나아갈 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드러냄으로 이 말씀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배우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자녀된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보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배웁니다. 우리가 맡은 바 책임을 어떻게 완수하는지 보며 가족의 책임에 대해 배웁니다. 그들의 부모인 우리가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지 보며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 배웁니다. 자녀들은 언제나 배우고 있으며 그들이 우리를 보며 배우는 것은 우리가 말로 가르치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들의 마음에 깊숙이 박힙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문제는 이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된 우리에게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아버지가 자신들에게 거의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그들을 거의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사랑하지 않고 계속 다투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자녀들은 그들 자신의 결혼생활에서도 이렇게 행동할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든 그렇지 못하든 자녀의 가장 첫 번째요 가장 좋은 선생님은 바로 부모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물론 그들은 다른 방법, 특히 학교를 통해 배웁니다. 만약 우리가 선생님으로서 역할을 잘 하려고 한다면 자녀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배우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단순한 교과 과정만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방법 역시 중요한 부분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교육에 있어서 자신들의 책임이 단순히 좋은 대학입학을 위한 좋은 학교나 학원에 보내는 것이 아님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녀 교육을 위한 부모의 책임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학교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 혹은 아닌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쉽게 대답할 만한 질문은 아닙니다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말씀대로 사는 것에 압도되어 절망하며 포기하지 않기 위해 격려의 말로 이 글을 맺고 싶습니다. 네, 이것이 우리 능력 밖의 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십시오. 우리가 진심으로 이 계명을 성취하길 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친히 알려주시는 분이라는 것에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말씀이신 예수님을 표현하기 위해 사도 요한이 사용한 헬라어는 ‘로고스’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언제나 말하고 가르치고 생각하는 것과 관련해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지혜 혹은 가르침, 지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이 말씀을 통해서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 혹은 로고스를 통해 만물이 지은 바 되었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이 능력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세상에 와서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이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는 진정한 지식입니다.

 

“대저 야훼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잠2:6).

 

하나님 아버지가 창조의 말씀을 하시고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기 위해 그 말씀을 세상에 보내셨던 것처럼, 모든 지혜, 지식, 명철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지식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소중히 간직하며 무언가 신적인 것-많은 신들의 왕국이든, 유교경전에서 말하는 하늘이든, 육신이 되신 말씀이든-과 이어주는 수단으로서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했습니다. 지식은 신이 주신 선물이며 신을 섬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많이 잊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식은 우리에게 있어 매우 실리적인 것입니다. 지식을 신성하게 여기는 마음과 지식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지식은 신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잘 해내고, 앞으로 나아가고, 성공적으로 경쟁할 수 있게 합니다. 나라들은 교육과 지식을 강조하는 목표를 통해 경제적인 것과 권력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이 중 어디에서도 지식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 위로부터 오는 특별한 축복, 우리보다 더 큰 존재와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것, 우리의 이해와 우리 스스로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류의 생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위로부터 오는 선물로서의 지식을 끌어안는 대신, 우리 자신의 목적대로 사용하기 위해 지식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려 움켜잡았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모든 의미, 전달하기 원하는 모든 것, 우리가 사용하려고 생각하는 모든 방법을 생각할 때, 특히 중요한 것은 빛의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을 전달하고 있음을 기억하며 겸손한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식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와 우리에게 주어진 좋고 온전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좋은 은사들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하기 위해 지식을 사용할 때, 지식도 우리에게 축복이 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5:1).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구하는 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전달된 말씀은 그들이 더 이상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식은 더 이상 진리에 대해 배우거나 진리이며 생명이신 분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단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디를 보든, 어디에 사람들이 모이든, 오직 생각 없이 바삐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흐름만 있을 뿐입니다.

 

단지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지식을 사용했기 때문에, 갑자기 파멸이 그들을 덮쳤습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파멸은 하나님의 징계였으며, 만일 그들이 다시 진리로 돌아오면 그들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주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분이 악해서 우리를 괴롭히기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이끈 우리의 이기적인 탐구의 불가피한 결과입니다. 지식의 잘못된 사용,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향한 지식의 사용은 파멸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증하며 지식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라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진리를 구할 때 우리가 찾게 되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지식의 올바른 근원을 향해 갈 때에, 우리는 지식이 주는 기쁨, 권력 혹은 성공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삶의 비밀과 주님이 주시는 완전한 자유의 기쁨을 배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보며 어두움 속을 방황하거나 인정과 안전, 즐거움을 향한 목마름으로 헤매는 대신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함과 그 빛이 가져다주는 기쁨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따스한 빛 가운데서 우리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 우리가 간절하게 열망했던 모든 것은 그 색이 바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단지 더러운 넝마조각에 지나지 않았음을 똑똑히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교육하고 우리 자신도 계속 배우려고 할 때 모든 교육과 지식, 진리 탐구에 온전히 겸손하게 접근해 나간다면 그것이 얼마나 축복이 될까요! 스스로 노력하고 우리 머리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 때조차 우리가 배우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런 지식이 있을 때 우리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진리이신 하나님을,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비롯된 만물에 대한 진리를 배우기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열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우주를 다스리기 위해 세우신 모든 법칙을 배우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에 대해 가능한 모든 것을배우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사랑하시는 인간-우리의 다른 점, 비슷한 점, 역사, 정치 조직, 노력, 성공, 실패 등-에 대해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능한 모든 것을 배우기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지식과 그 지식을 배울 수 있는 능력 둘 다. 배우고 연구할 때 우리는 성공을 보게 될 것이며 발견을 즐거워할 것이며 합당한 힘을 얻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선물을 주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듯, 하나님은 우리가 선물의 모든 유익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육신이 되신 말씀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지식을 누립시다. 지식의 열매를 누립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지식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됨으로 그분께 돌아가야 함을 기억합시다. 모든 지식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며 겸손하게 다가갑시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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