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그 학교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을 평가합니다.

시편 26: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학생, 교직원, 교육과정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교육현장에서 계속 진행해 나가야 하는 영역입니다.

평가는 ‘우리가 무엇에 가치를 두는가?’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생명의강 학교는 하나님 뜻에 합당한 성품을 개발하는 데에 가치를 둡니다. 이것은 일과 놀이가 모두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의미입니다. 학생들은 자신의 학습에 대해 먼저 책임져야 하며, 교사들은 학생의 가족들이 교육적인 권위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교사와 학생은 모두 주님께 하듯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모는 아이들의 교육에 함께 해야 합니다. 학교의 주된 역할은 교사와 학생이 이러한 책임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학생 평가와 멘토 선생님: 평가는 지적, 신체적, 사회적, 영적인 영역에 대하여 이루어지며, 9주에 한 번씩 부모님과 학생들이 모여 성장노트를 가지고 학생이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됩니다.

1년에 두 번, 각 학기 중에는 PTS데이가 열립니다. PTS데이란 Parents(부모), Teacher(교사), Student(학생)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PTS데이에는 멘토 선생님이 모임을 인도하게 되며, 이 날에는 학생과 함께 아버님과 어머님이 모두 참석하여 아이의 학교 생활과 성장에 대해서 나누는 시간입니다.

학생들은 모두 한 사람당 한 명씩 멘토선생님이 있는데, 이 멘토 선생님은 학생의 담임교사이며, 부모님은 1년 동안 가지고 계신 질문이나 염려를 멘토 선생님과 상의하실 수 있습니다.

졸업사정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전 과목을 성공적으로 Pass 해야 합니다. 만약 한 과목이라도 낙제를 했을 경우에는 해당 과목 선생님이 과제를 내줄 것입니다. 선생님이 제시한 기간 안에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제출하여야 해당 과목을 Pass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아래의 세 가지 영역들이 평가됩니다.

숙제:

생명의강 학교는 숙제가 수업에 도움이 될 만한 의미 있는 활동으로 만들어갈 것입니다. 숙제는 시간만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활동이어야 합니다. 학생들은 숙제를 꼭 해야 합니다. 학생들의 연령에 적절한 숙제의 양을 낼 것이며, 아이들에게 숙제가 너무 많아 힘들지 않도록 교사들이 서로 협력할 것입니다. 중학교 1학년과 2학년은 저녁시간 중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에 할 수 있는 숙제의 양이 적절합니다. 3학년의 경우에는 더 늘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숙제를 늦게 제출할 경우, 평가 등급이 낮아질 것입니다.

퀴즈/시험/프로젝트:

생명의강 학교에서는 평소 성적이 좋았음에도 기말고사를 못 보았다고 해서 성적이 저조하거나, 평소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기말고사를 한 번 잘 보았다고 해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의강 학교에서는 자주 시험을 봄으로써 아이의 성장을 판단할 것이며, 학생들이 학습에 성공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많은 기회들을 줄 것입니다. 시험은 짧은 퀴즈 형식과 정규 시험의 방식, 작문 그리고 구술시험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프로젝트의 결과도 평가 대상이 될 것입니다.

태도:

학생들은 자신의 학습동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성품 개발은 삶에서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일이며, 생명의강 학교의 기본 사명은 학생들이 하나님의 세상 가운데 각자의 위치를 찾고, 각자의 삶 가운데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생명의강 학교에서 태도 영역의 평가기준 4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노력- 이 학생이 개인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협동- 이 학생이 교사와 급우들에게 협력하고 있는가?
참여도- 이 학생이 학교 활동과 수업 활동에 지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또한 대화로 참여하고 있는가?
공동체(시민의식)- 이 학생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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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핑보드 위에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은 설령 서핑보드가 뒤집어질지언정, 우리는 손에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면 되니까. 지금 우리가 할 것은 한 마음을 품고, 이 진귀한 기회를, 짜릿한 서핑을 즐기는 것이다. -by Principal Liz

 

설리설리 두준두준......
불타는 열정으로 두근대는 가슴에 잠 못 이루던 때가 바로 어젯밤 같은데, 이젠 그 풋내기 시절의 설렘은 사그라지고 어느새 일 년 후 졸업을 앞둔 생강 ‘장아찌’가 되어 있다.

학교와의 인연은 나의 ‘초딩’시절 때부터 지속되어왔다. 부모님의 권유(?)로 준비된 백성 기도회에 참여하다 네 번째 강 프로젝트에 대해서, 당연히 학교에 대해서도 듣게 된 나. 자세히 알아들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안학교를 세울 거라는 말을 들었던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뭔가 Feel!이 왔다. ‘아, 내가 가야겠다!’

 

그후, 네 번째 강 계획에 관심을 가지게 된 나는 자발적으로 준비된 백성 모임에 참여해 예배하고,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기도하였다. 당시에는 무려 99% 정도가 어른들이었고, 학생이 별로(아예?) 없었던 데다 하나님도 잘 모르고 뭣도 모르는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매우 뻘쭘하고 괜히 좌불안석이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 그 시간들이 나를 준비시키는 귀한 과정이었음에, 그 부족하지만 순수했던 기도들을 들으셨음에 감사하다.

 

   
▲ 생명의강학교 입구에 세워진 표지판 ⓒ생명의강학교

 

중 1때 노동학교 참석은 생명의강 학교에 가야겠다는 나의 다짐을 다시 한 번 확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건 꼭 자기소개 할 때 대안학교 다닌다고 하면 왠지 멋있어 보일 것 같다거나, 친구들이 다 똑같은 학교 다닐 때 혼자서 다른 학교에 다니면 뭔가 특별해 보일 것 같은 거창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세상에 대한 반감과 자괴감으로 가득찼던 가련한 열네 살 소녀의 가슴에 적셔주셨던 북한선교에 대한 막연한 비전과 희미한 사명감이 이 학교가 ‘내가 꼭 가야 할 곳’이라는 마음을 먹게 하였다.

 

그런데 학교는 내 생각처럼 빨리 지어지지 않았다. 뿅 하고 생기면, 짠 하고 바로 가면 될 줄 알았는데....

 

2010년, 그러니깐 안식년으로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다양한 경험들을 쌓고 있을 즈음 태백에 새로운 학교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조금 과장을 보태, 학교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코딱지보다 조금 큰 건물에 우리 집 마당만한 운동장. 밤이면 긴 생머리에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나올 것 같았던. 저런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참 불쌍하다 생각했던. 예전에 친척집 가거나 할 때면 몇 번씩 지나치곤 했었던 초라했던 곳.

 

그런데? 새로 생긴 학교가 바로 그 ‘하사미 분교’라는 곳을 임시건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설마하니 그 학교가 바로 ‘그’ 학교였다.

 

게다가 자세히 알아보니 갓 태어난 그 신생학교는 중2까지밖에 학생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그 시절에는 선배님이 선생보다 높고, 한두 살 차이에도 마치 몇 십 년 세월이라도 차이 나는 듯이 깍듯한 존댓말을 썼었는데, 내가 그 학교에 들어가려면 일 년을 꿇어야 한다는 말.

 

버스에서 고등교복을 입은 친구들을 만나면 좀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 걱정이 되었지만, 동생들이랑 친구 먹는 건데 적응 잘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많은 고민 끝에 마음을 다잡고 원서작성을 하고 면접을 봤다.

 

보자마자 덜컥 합격. 고민도 고민이었지만 한편으론, 당시 다니던 일반학교를 자퇴하고 일 년 동안 잉여처럼 혼자 지내 학교가 많이 그립던 터라 몇 달 동안 기대수치가 무럭무럭 상승해 있었다.

 

특히, 등교 전날에는 너무 설레서 한 숨도 자지 못했던 것 같다. 내일 학교에 가면 양쪽으로 머리를 땋은 산골 아이들이 양 볼에 보조개를 드러내며 “아, 안녕? ^-^ 너무너무 반가워~ 정말 환영해 우리 친하게 지내자! 호호호”하며, 홍조 띤 얼굴로 다가와 내 손을 꼬옥 부여잡아 줄 것만 같았다나?

 

그 런 데 등교 첫 날,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눈앞에 펼쳐졌던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壯觀)’이 아니던가. 상상 속 영희와 철수는 다 어디가고, 중2 병에 걸려 보이는 아이, 맨 인 블랙도 아니고 올 블랙 패션에다가 검은 아우라가 비치는 아이. 부담스러운 눈빛들. 견제하는 듯한 느낌. 면접 때 학생들 자랑을 늘어놓으시던 외쿡인 교장선생님이 심히 원망스러워졌던 순간이었다.

 

오리엔테이션 시간의 그 어색했던 분위기는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뭐하는 학교인지도 모르는 것 같고, 학교에 억지로 온 아이, 심히 융통성 있는 커리큘럼, 가히 기독교 학교라고 여겨질 만한 행동들과 언어들은 그동안 꿈꿔왔었던 나의 학교생활, 그 환상을 증발시켜버리기에 충분했다.

 

   
▲ 생명의강학교

 

2011년, 나의 ‘생명의 강 항해일지’는 그렇게 열일곱 살 때 시작된다. 하지만, 난 그 대단한 학교에 얼마 되지 않아서 적응했고, 여자 애들과의 관계는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엄청난 진전을 보여 이전 친구들만큼이나 친해지는 결과를 달성했다.

 

우리는 자주 카페에 모여 하나님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가는 줄 몰랐고, 매일 문자메시지로 그분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들을 나누며 신앙의 깊이를 쌓았다. 우리, The Rols 1st들은 정말 많은 경험을 함께 겪었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같이했기에 얼굴만 보고 있어도 힐링이 되는 엿처럼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

 

지금 난 시트콤 같은 나의 학교생활을 즐기며 열심히 다니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모든 이들에게 학교가 이렇게 ‘재미있는 곳’이길 소망한다. 아직 어색하고 부족한 점들이 정말 많지만 시행착오를 겪으며 진전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이 학교의 역사 한가운데에 서 있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아마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는 학교 모습과 실제는 많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쭉 이렇게 싱숭생숭한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았으면 한다.

 

생명의강 학교에서 배운 것은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수용’, 그리고 비록 맨땅일지라도 과감하게 시도해보는 ‘용기’, 서로를 견뎌주는 ‘인내’, 혼란 속에서 그 분의 음성을 듣는 ‘믿음’, 감정을 표현하는 법, 소통하는 법, 사랑, 노동과 기도.

 

통일을 준비하는 학교인데 왜 북한에 대한 걸 배우지 않는지 답답했던 나에게, 그 땅의 문이 열렸을 때, 이 학교에서 받고 있는 이 훈련들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쓰일지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 길을 내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 모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저번 학기에는 국적불명의 ‘권태감’이라는 쓰나미가 우리를 덮쳐 한동안 허우적거렸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이 해답 없는, 하지만 뜻있는 길을 함께 개척해 나가고 있다.

 

버티기 힘들고 어려웠던 과정을 여기까지 견뎌낸 것은 서로를 향한 응원과 중보, 발로 뛰시는 부모님들과 인내심의 초 절정을 달리는 선생님들, 그리고 샘플로 실험되기를 자처한 우리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싶다.

 

많이들 묻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 안 돼?” 아침 예배시간에 나누었듯, 얼마 동안엔 나다나엘이 빙의해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으리오...하는 회의감에 푸욱 빠져 있었고. 허허
일 년의 학교생활을 앞두고 있는 요즘도 걱정이라는, 두려움이라는 놈이 가끔 내 마음 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곤 한다.

 

높은 벽 앞에서 좌절한다. 넘어진다. 진도도 많이 뒤처지고 있고, 뇌 속의 ‘delete system’은 통신망 속도와 더불어 날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고, 초스피드로 달려가는 세상과 초 여유롭게 가고 있는 학교 사이에서 이질감을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나의 마음속에 ‘확신’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또 일어선다.

혹자는 말한다. “넌 너무 현실을 몰라.” 현실, 하하... 대강 어떤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안다. 하지만, 걱정 안 해주셔도 된다. 나는,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난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에 덜컥 붙거나(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정말 감사하겠지만) 사회에서 쉽게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도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실패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지 말자는 뜻으로 오해하시지 않길 바란다. 우리는 각자에게 맡겨진 공부를 꼭 해야 한다. 열심히 하나님이 쓰실 때 기분 좋은, 최고의 도구로 준비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런 막연한 생각이 우리를 계속되는 귀차니즘 모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후회 안할 만큼만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처음이니만큼. 우리 모두 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함께’ 잡아주며 갔으면 좋겠다.

 

‘처음이니까 너희가 대학을 잘 가야 후배들에게도 본이 되고, 학교 위신도 높아지니까 열심히 잘 해봐라. 공부를 해야지 학생인데... 잘 될 수 있을까? 대학 잘 가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라... “여러분들에게 자주 듣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죄송한 말씀이지만 들을 때마다 부담이 되고 마음이 불편하다. 진리를 찾아 헤매는 우리의 건전한 방황에 쏟아지는 과분한 관심들. ‘될 대로 되라’식의 빨리빨리 트렌드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 식의 주입식 트렌드. 창조론에 대해 단연코 의심조차 해보지 않고, 그게 당연하다 믿어온 나로서는 아주 이해가 잘 된다.

종교도 강요되어지고, 교회 안에서도 알게 모르게 ‘사상’주입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으니깐.


우리는 이러한 흐름에 작은 파동을 일으키는 역을 맡았다. 대추나무라고 알고 있던 것이 실은 다래나무가 아닐까...처럼 조금은 무모해보일 수 있는 돌맹이들을 던지고 있다. 지금은 보잘 것 없어 보일지 모르나 후에 아주 큰 변화를 일으킬 스타트를 끊은 것이다. ?-!로의 변화는 사실상 진행 중인 것이다.

 

다시 돌아가, 현실은 내가 최상의 교육을 받고 있고, 하나님이 그의 자녀를 최상의 길로 인도하실 거라는 사실. 문제를 덮지 않고 해결하고 넘어가려고 하고,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하는 매일 더불어 변화하는 그것이 최상의 교육. 나를 너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끄실 것이 확실하기에 최상의 길.

 

아, 행복하다. 찾으며 두드리며 가는 이 과정이. 짜릿하다. 그 분의 음성을 내비게이션 삼아 한 발자국씩 조심스레 내딛어보는 이 삶. 여기저기서 후원 들어오는 기도를 촉매제 삼아 우리는 자라고 있다. 이것이 청춘이요, 열정이 아닌가. 이 뜨거운 삶을 이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축복을 나는, 우리는 포기할 수가 없다.

 

   
▲ 태백 생명의강학교 엄지은 양 ⓒ생명의강학교

작년까지만 해도 특정 학생들만 옮기던 의자와 책상을 이제는 다함께 옮긴다. 눈에 보이는 성장, 느껴지는 우리의 배움. 서로의 모습 속에서 발견되는 예수님. 어느 누구도 더해지거나 빠져서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정교하게 연결된 우리 공동체에서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 내가 소중한 사람이구나.’ 저절로 깨닫게 되는 시간들. 맏언니 미소를 짓게 만들어주는 상쾌한...후배님들?! 이런저런 에너지들로 인해 오늘도 지독한 회의감과 뿌연 무료함을 딛고 일어서 한 발짝 걷는다.

p.s. 이렇게 자라기까지 수많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학교에서의 시간들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 훈련이었는지 십대의 끝자락에서 새삼 느낀다. 그간 모난 나를 견뎌준 선생. 부모. 친구님들께 심심(甚深)한 감사를 드린다.

엄지은/ 생명의강학교 고등학교 3년

*이 글은 생명의강학교에서 발행하는 잡지 최근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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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기사 링크 http://www.ukore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25

 

자녀를 가르치는 데 있어 부모의 역할에 대해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신명기 말씀부터 시작해 봅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 6:4-9)

 

 이 구절은 우리의 모든 사랑은 주 우리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한다는 훈계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으로, 우리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생각나게 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애굽기 20:3)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순종, 그리고 사랑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 중 가장 첫 번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계명을 다른 의무들과 상충되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이 말씀 때문에, 목사나 사역자는 교회나 예배를 항상 가족에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성경 곳곳에는 우리가 배우자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하고 섬기라고 맡기신 사람들을 사랑할 때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 말씀의 구체적인 적용 방법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부모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자녀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사랑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부지런히” 이 계명을 가르쳐야 합니다. 집에 앉아 있으면서, 자녀들과 길을 걸어가면서, 쉬려고 누워 있을 때나 아침에 일어나면서도, 자녀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명령에는 우리 가정생활, 특별히 아버지된 우리를 위한 몇 가지 구체적인 암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가 아들과 마음을 나누고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함께 앉아 있을 때 아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서 자녀들을 양육하며 지켰던 확실한 규칙 하나는 가족 전부가 항상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은 대화와 나눔의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한국 문화에서는 식사시간에 별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저녁식사 후에 차를 마시면서 자녀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좀 이상할지 몰라도 위의 말씀을 연습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누워 있을 때, 일어날 때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이나 아침-아마 아침식사 때-에 가정 경견 시간의 형태로 시간을 갖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직장이나 교회에서 맡은 일로 매우 바쁘고 때문에 이처럼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관점에서 우선순위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야 합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녀에게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데 있어 가장 우선적인 책임은 아버지에게 있으며, 자녀와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냄으로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앞에 이야기한 것은 단지 몇 개의 예일 뿐이며 각자 자신의 가정에 가장 알맞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이 말씀”을 우리 손과 이마에 두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다시 말하자면 계속 눈에 띄는 장소에 말씀을 두라는 것입니다. 또한 손에 말씀을 두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 일하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녀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일을 할 때, 자녀에게 똑같이 하라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마에 말씀을 두는 것은 우리에게 항상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자녀들과 함께 하는 대화에서 바로 이런 것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마 직장에서든 길에서든 아버지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경건하지 않은 세상에서 경건을 위해 노력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볼 것입니다. 이 때, 저녁시간에 자녀들과 함께 나눌 구체적인 교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실제적인 어려움과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했는지 혹은 올바른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어떻게 고심하고 있는지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자녀들과 함께 고민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강력한 가르침입니까!

 

 이제 성경은 문설주와 대문에 말씀을 두라고 말합니다. 문설주는 집 안, 가족이 함께 사는 공간을 나타냅니다. 가족 안으로 들어갈수록 이 명령을 기억해야 합니다. 문은 집 안에서 세계 밖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언가 사회적인 결정과 판결을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바로 성문이었습니다. 가정에서 사회로 나아갈 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드러냄으로 이 말씀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배우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자녀된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보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배웁니다. 우리가 맡은 바 책임을 어떻게 완수하는지 보며 가족의 책임에 대해 배웁니다. 그들의 부모인 우리가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지 보며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 배웁니다. 자녀들은 언제나 배우고 있으며 그들이 우리를 보며 배우는 것은 우리가 말로 가르치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들의 마음에 깊숙이 박힙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문제는 이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된 우리에게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아버지가 자신들에게 거의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그들을 거의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사랑하지 않고 계속 다투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자녀들은 그들 자신의 결혼생활에서도 이렇게 행동할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든 그렇지 못하든 자녀의 가장 첫 번째요 가장 좋은 선생님은 바로 부모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물론 그들은 다른 방법, 특히 학교를 통해 배웁니다. 만약 우리가 선생님으로서 역할을 잘 하려고 한다면 자녀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배우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단순한 교과 과정만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방법 역시 중요한 부분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교육에 있어서 자신들의 책임이 단순히 좋은 대학입학을 위한 좋은 학교나 학원에 보내는 것이 아님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녀 교육을 위한 부모의 책임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학교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 혹은 아닌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쉽게 대답할 만한 질문은 아닙니다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말씀대로 사는 것에 압도되어 절망하며 포기하지 않기 위해 격려의 말로 이 글을 맺고 싶습니다. 네, 이것이 우리 능력 밖의 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십시오. 우리가 진심으로 이 계명을 성취하길 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친히 알려주시는 분이라는 것에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말씀이신 예수님을 표현하기 위해 사도 요한이 사용한 헬라어는 ‘로고스’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언제나 말하고 가르치고 생각하는 것과 관련해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지혜 혹은 가르침, 지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이 말씀을 통해서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 혹은 로고스를 통해 만물이 지은 바 되었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이 능력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세상에 와서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이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는 진정한 지식입니다.

 

“대저 야훼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잠2:6).

 

하나님 아버지가 창조의 말씀을 하시고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기 위해 그 말씀을 세상에 보내셨던 것처럼, 모든 지혜, 지식, 명철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지식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소중히 간직하며 무언가 신적인 것-많은 신들의 왕국이든, 유교경전에서 말하는 하늘이든, 육신이 되신 말씀이든-과 이어주는 수단으로서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했습니다. 지식은 신이 주신 선물이며 신을 섬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많이 잊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식은 우리에게 있어 매우 실리적인 것입니다. 지식을 신성하게 여기는 마음과 지식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지식은 신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잘 해내고, 앞으로 나아가고, 성공적으로 경쟁할 수 있게 합니다. 나라들은 교육과 지식을 강조하는 목표를 통해 경제적인 것과 권력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이 중 어디에서도 지식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 위로부터 오는 특별한 축복, 우리보다 더 큰 존재와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것, 우리의 이해와 우리 스스로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류의 생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위로부터 오는 선물로서의 지식을 끌어안는 대신, 우리 자신의 목적대로 사용하기 위해 지식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려 움켜잡았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모든 의미, 전달하기 원하는 모든 것, 우리가 사용하려고 생각하는 모든 방법을 생각할 때, 특히 중요한 것은 빛의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을 전달하고 있음을 기억하며 겸손한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식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와 우리에게 주어진 좋고 온전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좋은 은사들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하기 위해 지식을 사용할 때, 지식도 우리에게 축복이 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5:1).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구하는 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전달된 말씀은 그들이 더 이상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식은 더 이상 진리에 대해 배우거나 진리이며 생명이신 분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단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디를 보든, 어디에 사람들이 모이든, 오직 생각 없이 바삐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흐름만 있을 뿐입니다.

 

단지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지식을 사용했기 때문에, 갑자기 파멸이 그들을 덮쳤습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파멸은 하나님의 징계였으며, 만일 그들이 다시 진리로 돌아오면 그들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주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분이 악해서 우리를 괴롭히기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이끈 우리의 이기적인 탐구의 불가피한 결과입니다. 지식의 잘못된 사용,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향한 지식의 사용은 파멸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증하며 지식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라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진리를 구할 때 우리가 찾게 되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지식의 올바른 근원을 향해 갈 때에, 우리는 지식이 주는 기쁨, 권력 혹은 성공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삶의 비밀과 주님이 주시는 완전한 자유의 기쁨을 배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보며 어두움 속을 방황하거나 인정과 안전, 즐거움을 향한 목마름으로 헤매는 대신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함과 그 빛이 가져다주는 기쁨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따스한 빛 가운데서 우리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 우리가 간절하게 열망했던 모든 것은 그 색이 바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단지 더러운 넝마조각에 지나지 않았음을 똑똑히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교육하고 우리 자신도 계속 배우려고 할 때 모든 교육과 지식, 진리 탐구에 온전히 겸손하게 접근해 나간다면 그것이 얼마나 축복이 될까요! 스스로 노력하고 우리 머리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 때조차 우리가 배우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런 지식이 있을 때 우리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진리이신 하나님을,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비롯된 만물에 대한 진리를 배우기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열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우주를 다스리기 위해 세우신 모든 법칙을 배우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에 대해 가능한 모든 것을배우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사랑하시는 인간-우리의 다른 점, 비슷한 점, 역사, 정치 조직, 노력, 성공, 실패 등-에 대해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능한 모든 것을 배우기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지식과 그 지식을 배울 수 있는 능력 둘 다. 배우고 연구할 때 우리는 성공을 보게 될 것이며 발견을 즐거워할 것이며 합당한 힘을 얻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선물을 주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듯, 하나님은 우리가 선물의 모든 유익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육신이 되신 말씀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지식을 누립시다. 지식의 열매를 누립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지식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됨으로 그분께 돌아가야 함을 기억합시다. 모든 지식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며 겸손하게 다가갑시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13:52).

 

하나님이 제 마음에 북한이 열릴 때를 대비하라는 부담감을 주신 이래로 지난 7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제게 ‘서기관’의 마음을 주시고, 한국 역사를 공부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가족이 한국으로 온 것은 제가 한국 나이로 여덟 살 때였습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를 이곳에서 보내면서 제 마음에는 이 땅과 이곳 사람들을 향한 커다란 사랑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실제로 역사를 경험하면서 역사의 파편과 조각들을 배웠습니다.

 

저는 한국전쟁의 참상을 보았습니다. 파괴된 건물들, 우리 집에 있는 총탄 자국, 언덕의 참호들. 또한 차가 다닐 수 있는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뗏목다리 위로 걸어서 한강을 건넜던 것도 기억합니다. 4·19 학생혁명을 겪은 것과 박정희가 일으킨 군사쿠데타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저의 개인 과거, 개인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2003년부터는 보다 이전의 한국 역사를 알고 싶은 열망이 생겨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매우 풍부한 역사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진실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도록 내어드릴 수 있는 많은 보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옛것이든 새것이든 말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며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언급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현재의 모습까지 왔는지 이해할 수 있게 도우며 미래에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알려주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조차도 사용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역사 전체를 걸쳐 볼 수 있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이 나라는 수천 년의 역사에 걸쳐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물론 큰 고통과 어두움의 시절을 견뎠던 것도 사실입니다. 아마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두운 시절을 겪고, 한국 내의 악한 사람들과 한국을 미워하는 적들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일하셨고, 그래서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같은 사람들을 일으키셨다고 믿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인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전략가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또한 리더십과 애국심의 위대함을 보여준 겸손과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일하거나 리더가 되고 싶은 사람은 그의 삶과 일기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세종대왕은 백성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에 대해 깊이 이해했던 통치자였습니다. 세종대왕에게는 사회의 가장 비천한 사람들까지 깨우치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인재를 등용해서 존재하는 문자 중에서 가장 과학적인 소리글자(표음문자)를 만들었습니다. 몇 시간이면 배울 수 있는 훈민정음은 오늘날 정말 연구할 가치가 있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를 축복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결코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사람은 단지 과거의 위대한 인물 세종대왕뿐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에 대해 알 기회가 없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과 더불어, 기독교가 처음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외국 선교사가 아니라 중국에서 기독교를 접한 토종 한국 사람에 의해서였음을 자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것은 매우 독특한 경우입니다. 게다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처음 18세기에 가톨릭이 들어올 때, 100년 후 개신교가 들어올 때-이었습니다. 두 번 모두 기독교의 전래는 새로운 생각을 유입시켰고 기존의 관습에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지난 1백년, 2백년을 우리의 관점에서 다시 돌아볼 때, 실수를 지적하고 결점들을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킬만한 좋은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여기에 세상에 내놓아 조사할만한 오래된 보물이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제가 공부한 사람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윤치호란 인물입니다. 그가 일제 말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분분한 의견 때문에 오늘날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

 

그러나 저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총부리의 위협에 한국의 자주권을 일본에 내주는 문서에 사인을 하기도 했지만, 반면에 즉시 있던 자리에서 사직하고 모든 공직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백성들에게 진정한 독립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진정한 교육과 그리스도의 능력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교회만이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다.”(1889년 3월 30일 윤치호의 일기 중에서)

 

<새 하나님 새 민족>(케네스 M. 웰스, 하와이대학 출판부, 호놀룰루, 1990, pg51/ 김인수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1997)에 따르면 윤치호는 학교를 세우기 위해 공직 생활을 접었습니다. 그에 대한 글들과 그가 쓴 글들을 읽으면서 교육에 대한 그의 생각이 생명의 자연스런 부산물로 또한 예수원 사역의 일환으로 생명의강 학교를 세우는 데 힘을 쏟고 있는 우리의 생각과 정말 많이 비슷하다는 데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모든 진정한 교육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신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예수원 초기부터 우리는 노동의 중요성에 높은 가치를 두었습니다.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 이 말이 예수원의 휴게실에 새겨져 있습니다. 윤치호는 노동의 가치를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의 의무 중 하나이며 그 가치를 아는 것이 한국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송도(개성)에 한영서원이라는 실업학교를 세우고 다양한 실업교육과 농업교육을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교육과 노동을 강조하면서 또한 나라의 연합과 교회의 연합-우리의 변함없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의 중요성에 대해 연설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 당시에 민족주의자들 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경쟁이 커져가고 있었는데 바로 북서부 지역 사람들과 중서부 지역 사람들 사이의 경쟁이었습니다.

 

북서부 지방의 감리교도인 윤치호는 독립운동의 또 다른 위대한 인물, 중서부에서 온 장로교도 도산 안창호와 매우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틈이 점점 깊어져가고 있음을 인식하며 더 깊은 연합을 추구했습니다. 윤치호처럼 안창호도 나라를 위해서 기독교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세우고, 갈라진 틈을 메우는 한 방법으로 윤치호를 교장으로 모셨습니다. 또한 이 두 사람은 애국가의 가사를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윤치호가 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안창호가 썼다고 합니다. 아무도 애국가 가사를 쓴 것이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는 것은 아마 그들의 겸손과 그들의 긴밀한 협력관계 때문일 것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며 두 사람 모두 이 나라의 밝고 강한 미래를 위해 하나님의 방법을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각 사람은 그들 나름대로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지라도 두 사람은 한국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오늘날 더 연구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서 저는 한국의 곳간에서 이 ‘옛것’, 한국의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옛것을 꺼내와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는 사람도 같은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배울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 성경을 주셔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또한 그분은 창조사역의 모든 결과물들을 우리 가운데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역사적으로도 우리가 배울 만한 훌륭한 인물을 많이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구하며 이 세 가지를 배우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이해를 넓히고 미래를 향한 사역을 넓힙시다.

 

발문) 한국 사람들은 진실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도록 내어드릴 수 있는 많은 보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옛것이든 새것이든 말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현재의 모습까지 왔는지 이해할 수 있게 도우며 미래에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알려주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조차도 사용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역사 전체를 걸쳐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저는 성경적 관점으로 보려고 노력하면서 교육과 학교에 대한 여러 글들을 써오고 있는 중인데 오늘은 이와 관련해서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질문을 탐구해보고 싶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아마 정부의 책임이라는 대답을 가장 알맞은 대답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정부가 교육 방법과 인적자원을 규제할 뿐 아니라 많은 돈을 교육에 쏟아 붓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개념이 성경이 가르치는 교육에 얼마나 적합한지 알아봅시다. 또한 현재 공교육 개념의 근원을 살펴보고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추론해 보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먼저, 역사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현재의 공교육 개념은 18~19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다양한 사조에서 성장했습니다. 이 시대는 미국, 유럽, 그리고 동양에 많은 사회적, 정치적 변화들이 있던 때였습니다. 또한 훗날 독일 제국의 성립으로 이어진 프로이센 왕국이 처음 만들어진 때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육과 교육의 사회적 위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국가가 지원하는 의무교육의 개념은 유럽에서 많은 지지를 얻고 있었습니다만 실제로 현실화된 것은 프로이센 왕국 때부터였습니다. 독일의 여러 주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하기 위해 힘썼던 프로이센의 왕은 사람들이 귀족계급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왕은 이를 위한 첫 번째 수단으로 국가가 지원하는 의무적인 공교육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대개 교회나 가정의 손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교육이란 훗날을 위해 어린 세대를 준비시키고 기존의 가치를 전달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또한 많은 경우 교육은 함께 살면서 어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독일의 철학가 요한 고트리이트 피히테(1762-1814)는 왕의 생각을 지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교는 한 인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왕이 원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없는 그런 인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교육 시스템의 목적은 학생을 사회가 원하는 방법대로 생각하고 사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1763년 프로이센의 왕 프레드리히 2세는 모든 프로이센의 어린이라면 5세부터 13세까지는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도록 하는 학교교육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프로이센에서 시작하여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다스리고 있는 오스트리아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녀는 이 교육 시스템을 오스트리아에 대한 그녀의 통치를 공고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 프로이센의 공교육 시스템은 좀 더 세련되고 전문화된 훈련으로 발전했으며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자격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부가 교사, 커리큘럼, 학생들을 통제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부모의 선택이나 종교적 표현의 자유 등이 고려될 여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한편 미국에서는 매사추세츠 주의 주지사 에드워드 에버렛(Edward Everett)이 아일랜드의 감자기근을 피해 계속해서 밀려드는 가난한 아일랜드 사람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습니다. 주지사는 그 사람들을 매사추세츠 주의 훌륭한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강력한 종교적 믿음을 희석화하면서 비가톨릭 사회에 통합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해답으로 프로이센의 교육 모델을 정착시켰습니다. 미국 교육의 아버지라고 여겨지는 호레스 만(Horace Mann)이 이 부분에서 주지사를 강하게 지지했습니다. 그 결과 매사추세츠 주는 1852년 국가지원의 의무 공교육을 채택했습니다. 그 후 공교육 시스템은 다른 주들로 퍼져나가 결국 미국의 보편적인 교육시스템이 되었습니다.

 

  동양의 역사 또한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일본은 19세기 중반 근대화를 향한 발걸음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국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국민들을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프로이센의 시스템을 채택했습니다. 한국은 프로이센의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미국과 일본의 교육시스템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내면화시켜 국가의 이익에 맞게 지속적으로 변형시켰습니다. 이 결과 중의 하나가 현재 한국 교육계에서 불고 있는 폭풍우입니다. 다양한 이해관계의 갈등으로 인해 정치권, 학부모, 종교계 등이 공교육을 두고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도 국가 발전을 목적으로 국가 지원의 교육을 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1장3~5절을 봅시다.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이것은 매우 오래전에 있었던 국가 지원 교육의 예입니다.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이는 다시 말해 국가를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 특별한 교육 프로그램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교육을 받는 한편 성경의 법에 위배되는 음식은 거부했습니다. 그 교육 시스템으로 인해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는 것을 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벨론 왕에게 그들의 정당함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계속해서 교육에 대해 성경이 하는 말을 살펴볼 때, 매우 다양한 관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느 하나도 인간적인 목적을 위해 학생에게 특정한 모습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학생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하신 자유를 즐길 수 있도록 자유롭게 풀어줍니다. 성경적 교육은 하나님의 법과 구원의 도를 가르치면서 사람을 세웁니다. 그것은 아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법을 배우며 자녀들에게는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야훼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야훼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시78:4~8).

 

  누가 이 책임을 수행해야 할까요? 성경은 이 책임이 첫째는 부모요 두 번째는 제자-학생을 말합니다-를 만들라는 명령을 따르는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20).

 

  이 구절들을 묵상할 때 자녀의 교육에 있어서 우리의 책임이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자녀교육을 위해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수록 이 문제가 굉장히 큼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달에는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기독교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발문)성경적 교육은 하나님의 법과 구원의 도를 가르치면서 사람을 세웁니다. 그것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법을 배우며 자녀들에게는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생명의강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의 인생을 준비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목적을 준비하는데 육체적인 일(노동)을 필요한 교육의 하나로 보고 있으며, 그 일에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세상을 탐험하고 이해하길 원하셨기 때문에, 지식을 탐구하는 것에도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세상 역시 ‘알 수 있는’ 곳 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지식을 추구하게 되기까지는 훈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경적 세계관 안에서 우리는 지식, 학문, 노동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전인적 인간입니다. 교육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차원-영적, 혼적, 육체적, 정신적 차원-을 통해 전인적인 인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중 한 가지가 다른 것들보다 귀하다고 여기시지 않습니다. 전인적 인간을 기르는 것은 이 네 가지 영역이 통합될 때입니다. 이 네 가지 영역을 훈련해야 온전한 존재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학생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탁월하게 되길 바랍니다. 또한 삶에 찾아올 도전의 기회를 잘 준비하길 바랍니다. 이는 어떤 학생들은 대학을 진학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한국에서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하는 학생들은 대입 시험을 치러야 하지요.

 

그렇다면, 대학을 가기 원하는 학생들에게 노동은 어떤 준비를 시키는 것일까요?
먼저, 저는 ‘열심히 공부한다’는 표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은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는 누구나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는 암묵적인 추론이 포함되어 있지요. 하지만 제 경험상 막 중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은 대부분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한다는 건, 정보를 암기하거나, 한 페이지를 계속 쳐다보거나, 사건에 대한 단어들을 읽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지요. 아주 솔직한 부모들도 숙제나 설명을 해야 할 때면, 학생들이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또는 어떻게 공부하는 것을 도와주어야 할지 확신이 없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역시 하나의 기술이며, 노동은 직업을 준비하는 하나의 기술입니다.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대답하는 실제적인 훈련인 것이지요. 이는 우리가 학생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노동을 참여할 때에는, 즉각적인 노동의 피드백이 있습니다. 잘 참여하고 있는지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남들에게 확연하게 보이게 됩니다. 잘 참여하지 않고 있다면, 그 학생이 노동과 공동체의 학생들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교실에서의 경우, 잘 듣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조용히 앉아있다면, 잘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또한, 육체적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에는, 몸이 스스로에게 말해줍니다. 몸의 일부는 근육의 이완과 수축으로 통증을 느끼게 되지요. 이는 성장과 발달의 정상적인 부분입니다. 뇌 역시 신체 근육의 일부로, 발달을 위해서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학생이 노동의 방법을 배울 때,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방법을 배우게 되면, 결과를 내기 시작하지요. 학생들은 자신이 일한 것/하지 않은 것을 보면서 직접적인 원인과 결과를 배우게 되고, 책임감을 배우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신감과 책임감을 배우게 되고, 이는 교실과 학문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우리가 노동할 때에 우리의 정신은 멈춰 서는 것일까요? 다행히도, 탁월하게 작업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계속 생각하며,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신체를 하고 있는 일에 적용시킵니다. 그럼 우리가 교실에서 공부하거나 경청할 때 우리의 몸은 멈춰서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잠이 오게 되고, 잠을 깨워야 할 것입니다. 교실은 학문적인 배움이 일어나는 유일한 장소일까요? 물론 아니지요! 노동 시간만이 우리가 육체적으로 열심히 일해야 하는 시간일까요? 물론 아니지요!

 

노동과 공부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관계가 있습니다. 노동에서는 도구가 사용되는데, 교실에서 역시 도구, 또는 ‘방법’을 배웁니다. 도구를 사용 및 적합한 도구의 선택이 사실 일의 성과를 정하게 되지요. 한 과목을 마스터하기 위해 ‘공부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단순한 공식을 암기하는 것보다 효과적이고 탁월한 공부방법입니다.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운 사람과, 드라이버로는 책장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와 같지요.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많은 물건을 고칠 수 있는데,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여러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는 마치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고자 정보를 암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유용한 방법이고, 책장도 얻게 되겠지만, 다른 일을 하도록 적용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렇지만 지식을 적용하는 방법을 배운 학생들은 새로운 지식과 연결하고 새로운 질문을 할 것입니다. 학생들이 대입시험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답을 다 안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아는 것을 적용하여 더 큰 이해와 결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학생들은 자신이 아는 지식을 통해 답을 쓰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공식을 외워 답을 쓰는 학생들보다 시험 준비가 더 잘 된 학생인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 교육은 지식과 창조자가 어떠한 관계인지, 그리고 또 다른 지식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언제나 가르쳐야 합니다. 노동을 하면서 우리가 몸과 마음을 통해 배우는 것들이 교실에서 배우는 것들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노동에 유의미한 측면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사입니다. 교사 없이 도구를 사용하는 모든 방법을 적절하게 알게 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안내책자(메뉴얼)는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만 겨우 도와주는 정도지요. 저는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줄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여러분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었겠지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선생님 없이 그 말만 지키려한다면, 온전한 학습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학생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에게 도구의 사용법을 가르치는 교사가 성경적 관점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홀로 공부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는 지식이 많은 학생을 배출할 수는 있겠지만, 그 정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르쳐줄 교사가 필요할 것입니다. 학생들에게는 자신이 배운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기독교사가 필요합니다. 학생에게는 그 길을 말해줄 뿐 아니라 행함을 보여줄 교사가 필요합니다. 학생에게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계발해줄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생명의강 학교는 소년 소녀들을 온전한 방법-영적, 혼적, 육적, 정신적-으로 교육하는 일을 부모님들과 동역합니다. 학생들이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 앞에서 준비하며 나아갈 때, 그들이 생명의강 학교의 교육을 통해 삶의 도전 과제를 더 잘 준비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책임 중 하나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식(복음)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것,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다음 세대에게 말하는 것이다. 교육은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방법 중 하나다. 기독교 학교는 성경적 세계관을 통해 학생을 전인적인 인간(신체적, 정신적, 영적, 사회적인)으로 교육함으로 이 일을 행하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돈과 시간, 에너지를 희생한다. 한국 사람들 대부분에게 교육이란 마음에 아주 친숙한 주제이며, 또한 교육은 하나님께도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교육에 대해 아주 많은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육에 대해 생각하시는 바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언제나 같지는 않다. 성경적 세계관 교육은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교육과는 다른 목표를 설정하며, 다르게 가르치고, 보기에도 다르다.

 

이사야 55:8, 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로마서 12: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면, 우리는 본받는다는 것에 어떠한 압력이 가해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 문화(한국, 미국, 그리고 다른 문화) 속 교육 체계는 주로 학문적인 목표를 추구하고, 아이를 전인적으로 교육하지는 못한다. 그 문화가 아이를 창조한 분과 디자인한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원칙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헌신적이고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러한 세상의 방식(패턴)에 취약하게 된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생각에 변화를 받아야 한다. 교육의 영역에 중립지대는 없다. 모든 학교와 모든 수업엔 기본이 되는 신념들이 있으며, 각각의 수업은 이 신념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다. 모든 교사는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자신의 수업에 담게 되어 있다.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가 몸에 어떤 음식을 담는지(먹는지) 신경을 쓴다. 우리는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에 어떠한 것들을 담고 있는지 신경을 쓰는가? 아이들이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선생님들은 우리의 신념과 가치를 공유하는가? 우리는 아이들이 그들의 삶 가운데 성공할 수 있을까를 염려하는데, 우리는 성공을 보장해줄 수 있는 그런 준비- 예수 그리스도 안의 정체성과 부르심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것-를 시키고 있는가?

 

나는 지금이 그 어떤 때보다 더 기독교 교육이 시급한 때라고 믿는다. 현대 문화는 기독교 가정의 삶을 잠식하고 압박하고 있다. 취업, 직장, 학교 그리고 교회가 그들을 더 취약하게 만들고, 공급하지 않으며,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한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살기 위해 하나님의 기준에서 도망쳤다. 많은 이들이 삶의 목적이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 젊은이들이 말이다! 우리는 빼앗긴 이 땅을 되찾을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그 땅을.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우리의 적, 사단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았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들이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게 할지 모르나, 그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교육의 영역은 빼앗긴 땅이며, 이것을 되찾아오는 일은 우리의 특권이자 의무다. 이것은 명령이다. 우리는 해야만 한다. 이는 제안이 아니다. 생명의강 학교는 이 명령에 대한 반응이다. 이는 젊은이들을 세상에서 빼내려는 것이 아니며, 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의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준비시키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세상과 맞서게 하는 일이다.

 

마가복음 9: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마가복음 7: 7,8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긍휼, 정의, 자비가 어떤 것인지 보여줄 수 있고, 또한 동시에 전략적이고 목적의식이 있는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키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아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도구를 주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훈련시키는 것은 교육을 통해서이며, 이때의 교육은 ‘마음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변화를 받는다.’는 하나님의 성경적인 원칙을 따르는 교육이다. 아래의 누가복음 말씀은 내가 교장으로 섬기는 생명의강 학교의 학교 성구이다.

 

누가복음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은 “쉐마(Sh’ma)”로 알려져 있는 말씀을 인용하셨다. (“쉐마”는 히브리어로 “쉐마”, “들으라”로 시작되는 문장이다.) 쉐마는 예배로의 부르심이다. 쉐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부모로 하여금 자녀가 하나님께 더 연결되도록 자식을 가르치기를 촉구한다.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에 더 연결되게 하는가?

 

이것이 “쉐마”이다.

 

신명기 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교육은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의 제자 되게 하는 과정이다. 나와 남편은 우리의 가장 큰 책임이 우리의 자녀를 교육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세상 가운데 자신의 자리를 이해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만한 다양한 자료들을 찾아보았으며, 교육이 우리 가정의 우선순위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직업과 여가를 조정했다. 교육은 우리가 저녁밥을 함께 먹을 때 이루어졌다. 우리가 데려온 손님들, 친구들과 함께 이루어지기도 했고, 같이 살았던 사람들도 함께했다. 교육은 축구장, 농구코트, 도서관, 그리고 차 안의 대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아이들은 우리가 삶으로 증거 하는 것들을 보았고, 우리가 때로는 증거 하지 못하는 것도 보았고, 또 우리가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았다. 우리가 무엇을 사는지 보았을 때 교육이 일어났으며, 우리가 무엇을 사지 않는지를 보았을 때도 교육이 이루어졌다. 우리가 보는 것, 우리가 읽는 책과 우리의 평가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아이들이 듣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조차 교육은 이루어졌다. 신명기가 가르치는 것은,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장소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이해하고, 우리가 언제나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자녀를 사랑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 사려 깊고 현명한 부모가 되는 것이다. 사실 학교는 교육에 있어서 우리를 돕는 존재일 뿐이다.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의 질문에 답하고,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가르칠 수 있는 기회라면 모두 잡는 것.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유의미한 방법으로 “함께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자녀들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자녀들을 돌려받기를” 갈망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야고보서 4: 2-3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교회는 부모들이 자녀를 가르치는 것을 도울 책임이 있다. 하나님은 교육의 목표를 긍정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마태복음 29: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교육 목표라고 할 수 있을까?

 

제자를 만드는 일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학생을 두는 것과, 모든 명령에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복음전도의 대명령이며, 교육의 대명령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회는 개인을 복음화 하는 일을 더 우선시 하였으며, 학생을 가르치고 제자를 만드는 일을 소홀히 하였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많은 교회에 선교단체 및 선교사들이 소속되어 있지만, 학교는 얼마나 될까?

 

제자를 기르는 교육은 아주 중요하고,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다. 주일 하루에 주일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통합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이다. 하나님에게 중요한 일이라면, 우리는 필요한 시간을 들여, 목적의식을 가지고 학생들을 학교에 보내는 일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기독교 학교를 통해 하고 있다. 교사들과 그들의 방식, 관리자와 스텝들, 학교 경영까지 모든 것들이 세계관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전진하는 시각을 드러내준다. 우리 학생들은 세상의 싸움에서 피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킬 도구를 받았다. 학문적인 탁월함은 개인의 직업 능력 신장을 위한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다.

 

교육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가정에 있다. 쉐마를 기억하는가? 하나님은 아이들을 가정 안에 두셨다. 아이들을 교육할 책임은 일차적으로 가정에게 있으며, 아버지에게, 가정 내에서는 가정의 머리로서 아버지가 주된 책임을 진다.

 

시편 78:5,6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부모는 자녀를 다른 누구보다 사랑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디자인이며, 세상이 이를 바꾸거나 왜곡하려하는 만큼, 여전히 그 관계가 자녀를 양육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부모는 그 교육에 대한 책임을 보물같이 여겨야 한다. 이 책임이 박탈당한다면, 아이들이 고통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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